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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구도球都 인천과 야구(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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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굿모닝 인천( 2020년 12월호)
인천의 아침-구도球都 인천과 야구
구도球都 인천과 야구
/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제48회 봉황대기 고교야구에서 전국을 제패한 인천고 야구부 ⓒ 시 대변인실
탤런트 전노민(본명 전재용)의 꿈은 미국 ‘메이저리그Major League’ 진출이었다. 누구도 못 치는 마구魔球로 거인 같은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을 삼진 아웃시킨 뒤, 관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오 마이 갓’ 탄식을 뒤로한 채 유유히 마운드를 벗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재용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도화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창영초등학교로 전학하며 야구부원이 된 재용은 남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운동했다. 창영초는 야구 명문교로 졸업생들은 상인천중, 인천고로 진학하는 것이 코스였다. 류현진도 창영초 출신이다.
가난이 문제였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는 재용과 달걀부침, 장조림을 먹는 동료부원들과의 체력 차이는 컸다. 상인천중 야구부로 진학은 했지만 변변한 지원 없이 ‘헝그리 정신’으로 운동하는 동생을 보다 못한 큰누나의 만류로 재용은 유니폼을 벗는다. ‘메이저리거Major-leaguer’를 꿈꾸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좌절됐다. 2015년 만난 전노민에게서 백말띠, 동갑내기의 유대감과 동시대의 정서가 느껴졌다.
초등학생 전노민이 야구선수를 꿈꾸던 1970년대는 인천고와 동산고가 우리나라 고교야구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기다.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때는 1905년. 첫 전파자는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였다. 질레트는 이 시기 황성기독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지도했고 사람들은 야구를 타구打毬라 불렀다.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주축으로 1911년 결성한 ‘한용단’ 야구단은 경기 때마다 운동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국인과 일본인 간 야구 대결이 종종 펼쳐진 웃터골(현 제물포고 운동장)이 유명해진 것도 이 시기부터다.
한용단과 일본 팀과의 경기는 스포츠가 아니라 ‘싸움’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한을 야구로나마 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1924년 웃터골에서 열린 한용단과 일본 팀 미신(米信)과의 경기를 끝으로 한용단은 해체된다. 일본에 유리한 편파 판정이 나오자 조선인 응원단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갔고 일제가 이를 빌미로 ‘눈엣가시’를 뽑아버린 것이다.
한용단의 전통은 인천상우회와 고려야구단으로 이어졌으며 1920년대 후반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와 영화보통학교(현 영화초)가 인천 야구의 불씨를 이어간다. 1895년 개교이래 1933년 일본인학교인 인천공립남상업학교를 통합한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야구부는 1936년, 1939년 두 차례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하며 일본 갑자원甲子園 대회에 진출하기도 한다.
1970~1980년대 스타 김진영, 임호균, 양승관에서부터 현역 메이저리거인 류현진과 최지만에 이르기까지 인천에서 걸출한 야구 영웅들이 나온 것은 ‘115년 야구 역사의 도시 인천’의 숨결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3일 미국 플로리다 자택에서 별세한 김진영 감독만 해도 1935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고를 세 번이나 우승시킨 인천 야구인이다. 아들 김경기 역시 태평양 돌핀스를 이끈 인천 대표 선수를 지냈다. 인천시가 올해 많은 ‘해묵은 난제’를 해결한 시점에, 인천고가 화답이라도 하듯 ‘제48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서울고를 3대 2로 누르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국 우승을 따낸 인천 야구처럼 ‘자원순환’을 비롯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인천의 선정善政’이 결국은 세상에 서광을 비출 것이라 확신한다.
2020-12-02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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