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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친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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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리된 2차선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이리돌고 저리돌며 파란하늘 흰구름 벗삼아 달려 오다 보니 도산서원 주차장이였다.
조선시대 유생의 절반이 영남출신이고 그 절반이 안동출신이라고 전해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가 어쩐지 주차장에서 부터 학구적인 숙연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왜 영남이 절반이였을까?
아마도 고려시대 충신, 벼슬아치 ,유생등이 이성계의 혁명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또는 선비의 곧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 영남 ,안동 지역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재 해설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서원으로 향했다.
서원 입구의 600 여년된 노송은 마치 서원를 지키는 수문장 같기도 하고, 우리를 반겨맞이하는 서원의 주인 같기도 했다.
< 600 여년 된 노송 >
< 숲속에 묻힌 도산서원 전경 >
문안에 들어서니 반겨맞이해 주는것은 유생들이 모여 강(講 )하던 대청마루와 현판과 서편제 뜰이였다. 선비들이 오가며 담소하는 모습과 글 읽은 소리, 그리고 투호놀이 소리가 들리는 둣 했다.
< 대청마루와 현판,서편제 >
선조께서 도산서원이라 명명하신 사액 도산서원 현판이 중앙에 우뚝솟아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 대청마루 중앙에 자리한 사액 도산서원 현판 >
선조(1567 ~ 1608)께서는 당대 대 명필가인 한석봉(1543 ~ 1605)에게 내가 이르는 대로 쓰라 하시며 첫자를 원(院) 다음은 서(書) 그 다음은 산(山) 그리고 도(陶) 자를 명하였다. 한석봉이 임금이 명하는 대로 쓰다보니 마지막 陶 자에 와서 자기가 쓰고 있은 것이 도산서원 현판임을 알고, 그때서야 놀래 긴장한 나머지 陶 자가 위로 치솟게 쓰여졌다는 이야기는 웃음과 흥미를 자아냈다.
또한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1872. 고종8년)령 이후에도 지금까지 원형그대로 보전함으로써 더욱더 유명해졌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 당대 대 명필가 한석봉선생의 친필 현판 >
조선시대 그 많은 영상들 중 영남출신은 단 두 분 뿐 이란다.
한 분은 이순신 장군과 한동네서 자란 절친한 친구 사이이자 어린시절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생였던 조선 5대 명재상에 드시는 류성룡( 1542 ~ 1647)선생이시고, 다른 한 분이 바로 도산서원을 창시하신 퇴계 이황(1501 ~ 1570) 선생이시다.
이 황 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선조께서 선생을 사후에 영상으로 추증하여 내리셨다하니, 이 황 선생은 생전에 영상을 지내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이후 영상을 제수 받으신 것이다.
선생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로써 일생을 학문에 몸담으신 분으로 나이 60에 도산서당을 손수 지으시며 유생교육에 매진하신 분이다. 그 후 제자들이 선생님의 높은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 바로 이 도산서원인 것이다.
220여년이 지난 후, 정조께서 퇴계 이황선생의 학덕을 기림과 동시에 지방 유생들의 사기를 높히고자 어명으로 '도산별과'(1792년 정조16년)란 특별과거를 치른 곳이 바로 시사단이다.
< 도산별과를 치른 시사단 전경 >
당시 도산별과의 응시자가 무려 7,220 여명에 이르렀고, 합격자는 11명이었다고 하니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만이 당시의 사립대학격인 도산서원에서 공부 할 수 있는 혜택이자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퇴계 이 황 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에 안동에서 태어나 70세인 1570년 (선조 3년) 12월에 타계하셨다. 선생이 태어난지 7개월 후 부친께서 별세하시여 홀 어머니의 농사와 누에치기로 연명하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유교경전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후일 조선역사상 대학자로 큰 획을 남기신 분이다.
상감께서 여려차례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각종 벼슬자리도 거의 마다하시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시며 후학교육에 일생을 다하셨다고 한다.(다음검색에서 따옴).
선생의 학구적인 모습과 덕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선생의 구택을 방문 했다.
<퇴계 이황선생 구택>
< 퇴계 이황선생구택 전경 >
퇴계 이황선생의 생가를 마지막으로 쭉뻗은 도로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귀염둥이 작은 손녀 수은(受恩)이가 지루한지 어멈한테서, 운전하는 아범한테로, 이 할아범, 할머니한테로 뻔질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야단이다. 할머니가 필리핀 원주민이란 별명을 붙이고 내가 못난이
인형이라고 부르는 受恩이를 소개합니다.
귀엽고 재미있는 모습이지요. 원주민 같기도 하고,
못난이 인형 같기도 한 재롱이 작은 손녀입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차 창 밖을 보니 불현듯 이 나라를 건국하신 고
이승만 전 대통령,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정주영,
이병철 회장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 전 대통령은 그렇게도 반대하던
고속도로, 포항제철, 월남 파병을 결행 했으며, 파병 댓가로 미국에서 받은 1천만불에 정부 출연 1천만불
추가하여 공업지국의 기틀인 KIST(한국기술연구소)를 1965년에 건립한것이 산업부흥을 이루고 지금의 경제대국에
이르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든다.
정치인이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고 굴하지 않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밀고 실행한
경부고속도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제강 공장건설은 어불성설이라는 비난속에서도 굳건이 이겨내고 건설하신 포항제철이란
제강공장은 지금 세계에서 일류 반열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해준 경제계의
거물 정주영, 이병철 회장님등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40여년만에 국민소득 2만불 정도 까지
발전시킨 것은 오로지 그분의 탁월한 식견이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한국에 태어난게 천만다행이구나...만약 아프카니스탄, 아니
북녁땅에 태어났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온 몸에 닭살이 돋은 둣
했다.
그렇게 반대만 하던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생각을 하며 지내실까 ?.
이런저런 생각에
깜빡했나보다. 깨어보니 죽전휴계소다.
손녀 水恩이를 가슴에 꼭 안고 시원한 바람 쏘이며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으며 그리운
집으로 향했다.
<이로써 안동 답사기를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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