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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19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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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ㅋ: 경인일보(19. 7.18)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
이국만리서, 전쟁 최일선에서… '민족'을 위해 몸 던진 성직자
1897년 강화도 출생 어릴적부터 성공회 다녀
고교 졸업하던 해 3·1운동 준비중 발각돼 피신
적극적 전도활동 1923년 신자중 최초 하와이 파견
2년여 노력끝 호놀룰루에 '조선인 성당' 건립
'조 신부가 탄 보트가 차란카노이(사이판)에 상륙했을 때, 일본군 대포와 박격포탄이 바로 그의 등 뒤 물속에서 터지고 있었다. (중략) 포격이 멈추기도 전인데 신부는 비전투원 포로수용소로 날아갔다. 거기서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을 만났다. 조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갔다. "미국 사람을 겁내지 마시오." 그는 자기 모국어로 말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미 해병대가 치른 '사이판 전투'에 소위로 참전한 종군기자 짐 루카스(Jim Lukas)가 미 국방성에서 발행하는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신문에 실은 '노아 신부가 사이판의 해변을 강타'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분이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조광원(1897~1972) 신부다. 그는 인천의 독립운동가다.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함께 3·1 운동을 준비했고, 졸업 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태평양전쟁에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참전해 능통한 일본어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고, 강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조선인 동포를 구하는 데 힘썼다.
조광원 신부가 미국 하와이 '성 루가 성당' 앞에서 신도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조광원 신부 유족 제공
1897년 강화도 온수리에서 태어난 조광원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성공회는 같은 개신교 계통의 장로회·감리교보다 5년 정도 늦은 189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이 때문에 장로회나 감리교가 아직 전도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던 강화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는 게 성공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조광원 신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졸업을 앞둔 조광원 신부와 동기들도 3·1 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거리에 배포하고, 내리교회와 내동 성공회성당의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거리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다.
조광원 신부 생전에 출간한 '인고 77년사'를 통해 그는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형사들의 추격을 받자 우리는 즉시 각자 해산, 피신하게 된 것이죠. 그 즉시 나는 강화로 피신하게 됐습니다.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이때 체포당한 동지들, 같은 반 학우들은 학생으로 2개월 형을 받기도 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
졸업 후 일본계 은행에 취직한 조광원 신부는 국내 성공회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1921년 그는 성공회 전도를 위해 만들어진 '전도장려부' 기초위원 3명 중 1명으로 선임됐다.
성공회 평신도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조광원 신부의 모습은 당시 대한성공회 주교인 트롤로프(M.N.Trollpe·1862~1930)의 눈에 띄었고, 그는 조선에서 세례를 받은 성공회 신자 중 처음으로 1923년 12월 하와이에 파견되었다.
조광원 신부가 유년시절 다녔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松山 建作) 부제가 쓴 '미국 성공회의 조선인 교회와 조광원 -하와이로의 월경과 항일 독립운동'에 따르면 조광원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이곳 성공회 신자들은 조선인 신도만을 위한 성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23년 하와이에는 80여 명의 조선인 교인이 있었지만, 다른 성공회성당에 더부살이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조광원 신부의 2년여의 노력 끝에 호놀룰루에 '성 루가 성당'을 지었고, 하와이 조선인 성공회 신도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성당을 소유할 수 있게 됐고, 우리말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대조선독립단 가입해 자금 모금·전달 일제만행 알려
태평양전쟁 터지자 1944년 美 해병대 입대
전장 누비며 '강제 징집' 한국인 포로 구출 '활약'
1999년 애족장 추서… 온수리 성당에 기념비 세워
조광원 신부는 조국의 독립을 돕고자 박용만(1881~1928)이 설립한 대조선독립단에도 가입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로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광원 신부는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용만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 세운 '대본농간공사'에 자금을 보내는 역할을 했다.
조광원 신부 등 하와이 교민이 모은 독립자금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의 독립군 훈련 비용으로 사용됐다. 조광원 신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와 함께 '태평양시사'와 '국민보'를 간행해 일제의 만행을 우리 동포에게 알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광원 신부는 '한인자위단(韓人自衛團)'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해 당시 미국 국방성 지부가 있는 LA로 보냈다.
조광원 신부는 당시 함께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일을 '작은 복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1944년 조광원 신부는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입대하기 전 그는 국민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이 우리들의 토지 조선을 훔친 지 무려 40년이다. 몸을 던져 피를 흘려보면 그 피에 의해 되찾은 땅의 권리는 영원할 것이다. 죽자. 피를 흘리자. 피의 가치에 권리가 있고, 사상이 있으며, 독립이 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조광원 신부 기념비. /대한성공회 제공
조광원 신부는 전선 최일선에서 일본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부상자들을 의료소로 데려갔다. 또 포로수용소에 있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구출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조 신부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잊고 "미국인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의식을 공급하고, 의료로서 구조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잔혹한 벌을 준다고 들었다"고 조선인이 물으니 조 신부는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나의 친구이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학대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추산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인원은 782만7천355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조광원 신부가 태평양전쟁에서 구한 조선인들은 이처럼 강제로 징집된 사람이었다.
하와이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이원순(1890~1993)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광원 신부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사이판 섬 공략에 참전, 탄우 속을 헤치고 징용당한 동포들을 구출해 미국까지 후송했다. 당시 미 해병대 신문은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길버트나 마셜제도 전투에서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일본군과 함께 죽어갔으나 사이판에서는 조 신부의 활약으로 많은 한국인이 구출됐다고 설명했다"고 조광원 신부의 활동에 대해 평가했다.
정부는 1999년 조광원 신부에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7년에는 조광원 신부가 해방 이후 관할사제로 시무했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졌다. 조광원 신부는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다.
목회 생활을 하는 도중 힘들게 번 돈을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보냈고, 전쟁터를 누비며 조선인 구출에 나섰다.
조광원 신부를 연구한 대한성공회 석광훈 신부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조광원 신부는 이러한 종교의 목적에 가장 부합해 살다간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는 조광원 신부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발행일 2019-07-18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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