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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2/선학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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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3.14)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2
문학산 선유봉 아래 신선·학 사는 마을 '仙鶴'
옛이름 '도장리' 광복직후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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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말 선학동. 오른쪽 봉우리는 길마봉, 왼쪽 아파트 위 봉우리가 선유봉으로 보인다. 1980년대까지 시골마을이었으나 1990년대 연수동이 개발, 관교동과 연결되는 고가도로가 생기고 문학경기장이 생기며 급격히 도시화됐다. 최근까지 곳곳에 넓은 논들이 있었으나 아시안게임 경기장 공사가 시작돼 사라졌다. /사진제공=김식만(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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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연수구 선학동(仙鶴洞)은 문학산 동쪽 봉우리 선유봉(仙遊峰) 아래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후반 인천도호부 부내면에 속해 있었다. 도호부 청사가 여기서 가까운 지금의 관교동에 있었다.
옛 동네명들이 실려 있는 18세기와 19세기 발행 지지(地誌)들에 선학동 관련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큰도장과 간도장 혹은 작은도장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통틀어서 도장·도장이·도재이·도재 등으로 불렀다.
큰도장은 문학경기장 입구 굴다리 앞으로 남아 있는 옛날의 큰길을 따라 형성됐던 곳이고, 작은도장은 지금의 큰길 건너 창덕궁 음식점 앞을 거쳐 남동공단로로 가는 길 쪽에 있는 촌락이다.
세금이나 군역(軍役)을 부과할 만한 법정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학산리(지금 관교동의 일부)에 포함됐을 개연성이 있다.
도장이는 1903년에 처음으로 부내면 도장리(道章里)로 문서에 기록됐고, 1911년 간행 <조선지지자료>에도 그렇게 올라 있다.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 일부를 떼어내 부천군을 만들 때 거기 소속되고 학산리 일부를 합해 문학면 도장리가 됐다.
1937년 일본식 정명으로 바꿀 때 무학정(舞鶴町)이라 했다.
문학산 동쪽 봉우리 선유봉 아래 아늑한 곳에 학이 날아와 춤을 추어 그렇게 지어졌나 상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무학정은 일본어로 마이즈루마치. 일본 교토(京都) 북쪽에서 유서 깊은 지명이다.
오이타현(大分縣)에도 있고, 조선땅에서는 경성·마산·경북 예천 등지에 같은 정명을 붙였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전국의 일본식 정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선학동으로 바꾸었다.
문학산 제2봉인 선유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한 글자씩 따서 그렇게 한 것이다.
도장리라는 분명한 재래지명이 있는데 왜 그걸 버렸을까.
도장은 여러 동음이어가 있어서 의미가 헷갈리는데다가 전국에 같은 지명이 많아서였든지, 혹은 학(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1946년 지명위원들이 버린 '도장'은 무슨 뜻을 가진 지명일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중세국어에서 도장이 안방을 뜻하는 규방(閨房)과 동의어로 사용됐던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규방처럼 아늑한 땅을 가리키는 곳을 도장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를 담은 지명은 충북 청주와 강원도 홍천 등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선학동은 정말 안방처럼 아늑하고 푸근하다.
문제는 도장골이 아늑하기는 하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지 않고 절반은 바다를 향해 터져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옛날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던 부평이씨 가문이 조상의 묘를 쓰면서 항렬을 따르지 않고 관직이 높았던 사람들을 위에 써 도장(到葬)을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첫째가 신빙성이 높아 보이나 확실한 기록이나 관련 설화는 없다.
필자는 간도장인 선학역 부근에서 십여 년 살았다.
옛날에 선유봉은 가느다란 샛길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등산객이 많아 길이 넓어지고 정자 하나가 서 있다.
문학경기장과 고속도로, 인천의 남부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학동 사거리 쪽에서 올려다보면 선유봉 옆 봉우리 둘이 마치 쌍봉낙타의 등처럼 솟아 있다.
옛날에 소 등에 물건을 싣던 기구를 길마와 유사해 길마봉이라 했고, 선학동 토박이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전국에 같은 지명이 많다.
삼남사투리는 ㄱ이 ㅣ모음을 만나면 ㅈ으로 바뀌는 구개음화 현상이 강해 질마재라고 한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집 <질마재 신화>도 그렇다.
선학동 큰도장에서 관아가 있던 옛 관교동 문학동으로 넘어가던 옛 산길을 무지미고개(물이 없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라고 했고, 좀더 올라가면 성황당이 있어 성황당고개라 했다.
문학산 주봉과 선유봉에서 발원한 시내가 큰도장과 작은도장을 스치며 내려가 드넓은 무논지대를 만들었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는 거기 있던 줄방죽·천양방죽·사미들방죽 등 방죽 이름을 열거했는데, 필자 또래 토박이들에게 물으니 잘 알지 못한다.
아시안게임 경기장들이 작은도장과 들판에 들어서고 있으니 모두 사라질 터이다.
2014년 03월 1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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