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1/연수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3. 7)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1
해변 '팔 오금'처럼 휜 먼우금
"수명 연장" 의미 담아 '연수리'
문학산 남쪽 따뜻·해안경관 수려
오늘날 연수동·청학동 등 아울러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오늘날 연수구 연수동(延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은 조선시대 후반 인천도호부 원우이면(遠又爾面)에 대부분 속하고 일부 남촌면에 속해 있었다.
원우이는 순우리말 '먼오금'의 이두식 한자 표기이며, 굽혀진 팔의 오금 안쪽처럼 해안선이 반월형으로 휘어져 있어 붙인 지명이다.
당시 우리말 기록을 보면 '원우금'이라고 쓴 게 많다.
한자로 표기한 지지(地誌)들에는 '원우이'로 쓰고, 민간에서는 '원우금'과 '먼우금'을 같이 썼다고 보면 된다.
이 먼우금 해안은 갯벌 매립 이전 옛 지도를 보면 정말 오금처럼 휘어진 길고 먼 해변임을 알 수 있다.
원우이면은 대략 오늘의 연수구와 같은데, 1760년 간행 <여지도서>에 인구가 247가구 1523명, 남자 796명, 여자 727명으로 실려 있다.
1789년 <호구총수>는 252가구 1595명, 남자 595명, 여자 803명으로 실었다.
2011년 연수구 통계자료를 보면 인구 29만명이 넘으니 거의 200배가 늘어난 것이다.
<호구총수>는 원우이면의 동네명으로 망해리, 옹암리, 묵암리, 동막리, 척전리, 사인리 등을 기록했다.
1842년의 <인천부읍지>는 그 외에 한진리, 함박리, 대아도리, 소아도리, 야동, 옥동 등을 더 올려놓았다.
그 중 망해리와 함박리를 지금의 연수동으로 보면 된다.
청학동은 산뒷말이라고 불렀는데, <호구총수>와 <인천부읍지>엔 기록이 없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인적이 드물고 변변한 마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망해리와 함박리는 함박리 하나로 통합됐으며, 1906년 인천부가 동명을 개정할 때 서면1리로 됐다.
이때 청학동 지역 산뒷말은 산후동(山後洞)이란 한자 지명으로 기록됐는데, 서면2리로 됐다.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에는 신기(新基), 표산(瓢山), 마리(麻里), 갱고지(更古之), 간촌(間村), 부수지(浮水之), 신촌(新村), 묵동(墨洞) 등이 인천부 서면1리라는 동네명으로 실려 있다.
지금 연수동에 있던 자연취락이라고 보면 된다.
후곡(後谷), 내곡(內谷), 청릉(靑陵) 등의 지명이 서면2리로 실려 있는데, 이곳이 오늘의 청학동이었다.
1914년 4월1일 서면과 개항 전 원인천 중심이었던 구읍면을 통합해 부천군 문학면을 만들면서 서면1리를 연수리로 바꿔 거기 포함시켰다.
문학산 남쪽 기슭이라 따뜻하고 해안 경관도 좋아 여기 살면 수명이 연장된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전한다.
그런 이유로 결핵요양소가 지어졌고 그게 오늘 적십자병원이다.
필자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 초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1970년대만 해도 무논 지대 사이 좁은 길을 차를 달려 거기에 가곤 했다.
인천여고 쪽에서 적십자사 지사와 영일학교 쪽으로 해서 서면2리는 청학동으로 바꿔 포함시켰다.
문학산 기슭에 있는 마을인데다 청릉이란 뜻이 좋아 한 글자씩 따서 청학리라고 했다.
1940년 문학면을 인천부에 편입시키면서 연수리를 연수정으로, 청학리를 청학정으로, 그렇게 일본식 정명으로 바꾸었다.
1946년 1월1일 연수동과 청학동이 됐다.
그 후 1990년대 연수구가 인천의 최고 주택지로 떠오르면서 연수구는 1·2·3동으로 분할됐고 청학동은 한때 연수동이라는 행정동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다시 분리됐다.
연수동과 청학동도 토박이 원로들이 돌아가신 터라 재래 마을들이 어디이며 지명어원이 무엇인가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는 1980년대에 원로들의 구술을 채록해 함박촌(咸朴村), 배곶뿌리말, 고해(高海)말, 표산(瓢山)말, 염전마을, 갱고지(更高地)말 등으로 기록했다.
위에서 살핀 <조선지지자료>와 비슷하다.
함박촌은 함씨와 박씨가 많이 살아서, 배곶뿌리말은 배나무가지를 곶았던 곳이어서, 고해말은 갯벌이 높아서, 염전말은 염전이 있어서, 갱고지는 옛 사람이 살던 마을 위에 다시 생긴 마을이라서 붙은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61년 국무원고시 16호로 공시된 전국표준지명에는 연수동의 대표 마을인 부수지를 동경 126.41 북위 37.25로, 신기를 126.41과 37.25, 묵동을 126.41과 27.24로 기록했다.
청학동의 청릉은 126.40과 37.25로 기록했다.
삼국시대에 능허대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무사히 다녀오라고 세 번 손짓하며 불렀다는 청량산의 사모지고개(三呼峴)는 청릉과 같은 경위도로 실려 있다.
인터넷으로 인공위성 지도를 불러내면 위치를 찍을 수 있다.
2014년 03월 07일 (금)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