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0/학익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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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2.28)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0
산자락이 학날개 닮아 학익동
천년역사 불구 지명기록 없어
먹을거리 걱정 없던 평화로운 어촌
일제 때 매립 … 집창촌·공장지대 돼
법원 이주 이후 고층건물들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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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구 학익동(鶴翼洞)은 북방형식의 '돌멘'이 있어 일찍부터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일단의 주민이 정착해 햇골(蛤河)이라는 마을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뜻으로 보아 조개가 많았던 듯하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역사자료가 한 줄이라도 있는 동네는 드문데, 학익동도 그 중 하나이다.
갯벌을 향해 뻗어 내려간 맑은 하천과 갯골에 대합과 상합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어서 먹을 것 걱정 없던 평화로운 어촌이다.
까마득한 옛날을 상상하게 한다.
조선 숙종 10년(1684)에 부평이씨 가문이 낙향해 제운리(霽雲里)라는 마을을 형성했는데, '제운'은 그 가문을 대표하는 학자의 호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이곳은 줄곧 인천도호부 부내면 읍내리에 속했으며, 독립된 동리촌명(洞里村名)을 갖지 않는 한적한 지역으로 이어졌다.
18세기와 19세기에 나온 인천의 지지(地誌)에는 제운리 지명이 올라 있지 않다.
1911년의 '조선지지'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많은 소지명을 수록하고 있고, 인천과 관련한 소중한 소지명 자료도 많다.
아쉽게도 거기에 오늘의 학익동 지역은 학익동(鶴翊洞)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웃 원우이면에 속했다가 뒷날 부내면 동네들에 통합된 청릉(靑陵, 청량산의 학익동 방향 산자락)이라는 지명이 1781년의 '인천부읍지'에 실렸다.
그건 동네명이라기보다는 산기슭이나 골짜기 이름으로 보인다.
학익동은 1000년 역사를 가졌고 꽤 넓은데, 왜 그럴까.
부평이씨 일가는 떠났고, 오늘의 학익동은 대부분 한참 뒤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땅이기 때문이다.
국립지리원이 발간한 '한국지명총람'(1982)은 중일전쟁 이후 갯벌을 매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 인천지방법원, 인하공전, 인하사대부고 등이 앉은 구릉 외에는 모두 갯벌이 매립된 곳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학익동의 근대 소지명들은 필자 선친이 1980년대에 마을 원로들의 구술을 채록해 작성한 '인천지명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제운리-이곳 출신인 부평이씨 가문에서 제운(霽雲)이라는 호를 가졌던 학자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청릉마을-청량산 아래 능이 있었다. 뒷골말-청릉마을 뒤편이다.
큰말-본마을로 일명 물푸레말이라고 했다. 옥터-감옥이 있었던 곳이다.
이상이 선친의 기록이다.
행정리명이 없이 막연히 인물의 호를 따서 제운리라고 불렸던 오늘의 학익동은 1903년 대한제국 시대에 와서 처음 학익리(鶴翼里)라는 지명을 얻었다.
산자락의 모습이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1906년 지난날 부내면이 이름을 개항장 쪽에 내주고 구읍면이라는 이름으로 바뀔 때도 그대로 썼다.
다만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는 익(翊)으로 썼는데, 학의 날개를 뜻하는 의미는 같다.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 일부를 떼어내 부천군을 만들 때 거기 소속되고 문학면 학익리로 됐다.
1937년 일본식 정명으로 바꿀 때 그냥 학익정(鶴翼町)이라 했으나 광복 후에 학익동으로 회복됐다.
1970년에는 1동과 2동으로 분동됐다.
학익동 지역은 1930년대에 매립된 뒤 공장지대로 됐다.
자료를 보면 8·15 광복 당시 수십 개 공장이 있었다. 일립제작소, 조선철강, 조선강업, 조선농업사, 동양전선, 삼릉전기, 흥한방적, 조선농약, 고려철강 등이 눈에 띈다.
대부분 일본인들이 경영한 적산을 불하받아 운영하는 것이었다.
필자 소년시절 기억 속에 있는 공장들은 한국농약, 동양화학, 한일방적, 청구화공 등이다.
이 공장 정문과 굴뚝들은 소년형무소 건물과 함께 선명하게 기억 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성매매를 하는 집창촌이 들어서 30~40년 유지되다가 몇 해 전 사라졌다.
그 집창촌 때문에 인천의 남정네들은 학익동을 '끽동'이라는 은어로 불렀다.
학익동은 죄수와 창녀가 있는 곳이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동네였다.
그러나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된다고, 10년 전 법원 검찰청이 들어오면서 변호사들이 몰려와 고층건물이 임립하고 집값·음식값이 비싼 고급스런 마을로 바뀌었다.
선사시대에 고인돌을 만들고, 1000년 전 백제인들이 터를 잡았던 마을, 학이 비상하는 형상을 가졌었으니 필시 상서로운 동네였다.
이제 본연의 모습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02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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