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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8/도화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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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2.14)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8
말 건너던 다리 도마교·무논지대 화동 합쳐 도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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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구 도화동(道禾洞)은 조선시대 후기 인천부 다소면에 속했다.
도마교(道馬橋), 못머리말, 숫골(禾洞), 못아래말, 다랭이말, 메기골말, 소댕이말, 신계 등 정겨운 재래지명이 있었던 곳이다.
대표성을 가진 큰 촌락이 도마교와 숫골이었는데, 다른 작은 촌락들은 그것의 범주에 들어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표적인 두 촌락의 앞 글자를 딴 것이 오늘날 도화동인 셈이다.
이곳 취락들이 도마교리와 화동리라는 대표지명으로 묶인 것은 1903년과 1906년 인천부가 동명을 정리할 때고, 1914년 인천의 일부와 부평 일부를 합해 부천군을 신설할 때 거기 들어가며 도화리로 명명했다.
1937년 일제식으로 지명을 바꾸며 앵정(櫻町, 사쿠라마치)이라고 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도화동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후 1·2·3동으로 분동됐다.
도마교리는 수봉산 진입로 일대 지역이다.
말이 다닐 만한 다리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향토사가들은 밝혔다.
19세기에 나온 인천부읍지들도 그렇게 '도마(道馬)'라고 기록했다.
문제는 더 오래된 문헌인 '호구총수'(1789년 간행 추정)는 '도마(刀馬)'라고 썼다는 점이다.
자료를 더 찾아보려 하나 이전 지명은 잡히지 않는다.
화동은 벳말 또는 숫골로 불리던 마을이다.
옛 인천대학교 앞 도화오거리 일대 저지대를 가리킨다.
숯을 굽던 곳이라 숯골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끝소리 대표음화로 인해 숫골로 불렀다고 말하는 사람, 혹은 쑥이 많아서 쑥골이라 했고 그게 숫골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기록과 정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에서 쑥골 일대에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하고 중국인 채소밭이 많았다고 썼는데, 지금은 부숴서 없어진 옛 선인체육관 구릉, 즉 옛 인천대학교가 앉았던 언덕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숯이나 쑥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았다.
고어사전을 보면 우리말의 벼(禾)는 중세어에서 '쉬'였고, 숫골 일대는 드넓은 무논지대였다.
한자지명과 우리말 지명을 병기한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는 화동리(禾洞里)와 함께 '슉꼴'이라고 기록했다.
벼를 '쉬' 또는 '슈'라고 한 게 곡식의 이삭 수(穗)에서 유래했는지, 혹은 벼가 자라는 물(水)에서 유래했는지 어원을 밝히는 건 복잡하다.
물에서 유래했을 개연성도 있다.
미추홀, 매소홀, 소성 등 고대 인천의 지명이 물이 많다는 의미였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하고 있고, 도화동이 속했던 다소면도 다수골로 불렸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옛날 기록이 줄곧 화동(禾洞)으로 기록했고, 필자 선친께서 20~30년 전 이 곳 원로들에게서 채록한 기록에 벳말이 있으니 그렇게 믿어야 할 것이다.
다랭이말은 도마교리에 속했다.
제물포 쪽에서 올라가는 수봉산 공원 입구를 일컬었는데, 거기서 아들이 많이 태어나 다랑(多郞)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메기골말은 숫골에 있었을 것이다.
신계동(新溪洞)에 대해선 6·25전쟁을 전후해 월남한 사람들이 촌락을 이룬 곳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위의 '조선지지자료'에 신계곡(新溪谷, 우리말 신비꼴로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상상력이 만든 민간어원설로 보아야 한다.
그 외에 '조선지지자료'는 화동리의 저명한 지형지물로 북망산(北邙山), 수곡(壽谷, 슈꼴), 각곡(角谷, 각꼴), 봉수곡(鳳壽谷, 봉슈꼴), 응곡(鷹谷, 매봉재), 귀야현(貴也峴, 귀야위고개), 지하야(池下野, 못아래들), 한둠뜰, 소당야(小堂野, 소당이뜰)를, 도마리의 저명한 지형지물로 남방축(南方築, 남원방죽), 북방축(北方築, 부원방죽), 개듬물 등을 기록해 놓았다.
개듬물을 필자 선친은 개우물방죽이라고 쓰셨다.
수봉산 가까운 도마리 지역에는 저수지와 방죽이 많았고, 도화오거리 숫골 일대는 골짜기와 연못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앞의 내동편에서 살핀 것처럼 지금 동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아래 소방파출소까지 올라가는 왼쪽 중간지점에 옛날 의장지라고 부르던 중국인 묘지가 있었다.
그것이 옛 인천대학교 자리로 옮겨갔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이 채소농사를 지으며 많이 살았다.
2014년 02월 1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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