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7/주안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2. 7)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7
우리나라 최초 천일염 생산지
전철 주안역 이름 따 주안동
옛 '주안면'에는 주안동 일부뿐
대부분 간석·구월·십정동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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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구 주안동(朱安洞)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 인천부 다소면에 속했으며, 사미리(士美里)와 충훈부리(忠勳府里)로 불리던 지역이다.
유의할 것은 그 시기에 지금의 주안동이 아닌 다른 곳에 주안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주안면은 오늘날 주안동인 석바위가 들어 있었지만 대부분 간석동, 구월동, 십정동 등의 지역이었다.
1907년 이 나라 최초로 갯벌을 매립해 조성한 염전 가까이 철도역을 만들게 됐는데, 당시 그곳에 촌락명이 없어서 옛 주안면에서 끌어다가 주안역이라 붙였다.
그러다가 뒷날 철도역세권으로 발전하며 주안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다시 사미리와 충훈리로 돌아가 보자.
1911년에 나온 '조선지지자료'는 한자 지명 외에 우리말 지명도 병기하고 있다.
사미는 그냥 사미(士美)라는 한자 지명만 올렸고 충훈부리는 충훈리(忠勳里)와 '츔부'라는 우리말 지명을 올려놓았다.
그밖에 성촌(城村, 우리말 잿말로 기록. '재'는 城을 뜻하는 사멸된 고유어), 양지동(陽之洞, 우리말 지명 양지겻으로 기록), 송내촌(松內村, 우리말 지명 솔안말로 기록), 그리고 한자 지명 없는 '션앙댕이'를 올려놓았다.
대략 이것들이 100년 전 기록에 있는 현재 주안동 지역 지명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밖에 당시 인접한 주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는 석암리(石巖里, 우리말 지명 석바위로 기록), 석촌(石村, 우리말 지명 돌말로 기록)이 수록돼 있다.
사미리의 중심은 오늘날 신기촌 마을, 그러니까 주안7동 쌍룡아파트와 남부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럼 '사미'란 무슨 뜻이었을까?
'인천부읍지'와 '호구총수' 등 조선 중기와 후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인천관련 지지 중엔 설명 기록이 없다.
필자의 선친은 '인천지명고'에서 '아름다운(美) 선비(士)'에서 유래하며 판서를 지낸 이한경(李翰卿)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위에서 들었던 인천 지지들의 일부는 사미를 '사미(士味)'라고 썼는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음차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훈부(忠勳府)란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이나 그 후손들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청이다.
지금의 주안사거리 옛 시민회관 일대를 충훈부 마을이라 불러왔으므로 거기 충훈부 인천지청쯤이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지역은 갑자기 외래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일본인 거류민들이 늘어나 게다짝 소리로 가득 찼던 개항장 지역과 달리 개항 직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인천의 일부와 부평의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만들 때 다소면과 주안면을 통합해 다주면(多朱面)을 신설하면서 거기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때 사미리와 충훈리에서 한 글자씩 따서 사충리(士忠里)로 명명했다.
1937년 1월 관교리와 간석리 일부를 합해 주안정(朱安町)이란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바꾸었고 1946년 1월1일 주안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지난날 주안면 중심지는 아니지만 주안역이 이 지역 중점이어서 그렇게 붙이는 '넌센스'가 일어난 것이었다.
참고로 주안의 한자 표기를 살펴보면 1760년 경 발간 '여지도서'는 朱岸, 1789년경 '호구총수'는 朱安, 1899년 '인천부읍지'는 朱雁이다.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인천 향토사가들은 마치 붉은 기러기 같은 형상을 가진 지금의 약사사가 있는 주안산(朱雁山)에 근원을 두고 설명했다.
필자가 중학교에 들어간 1960년대 초 인천기계공고는 무논지대 가운데 앉아 있어서 버스를 타고 경인국도를 지나가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이 교사와 운동장이 모두 보였다.
석바위를 지나면 높이 5m 폭 10m쯤 되는 거대한 바위가 길가에 보였다.
경인선 기차를 타고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안역은 염전 벌판 가운데 서 있었으며, 역전 마당에는 허옇게 소금기가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고즈넉했던 주안동은 그 후 급격한 인구 팽창으로 1동에서 8동까지 분동되고 오늘에 이르렀다.
1970년대 중반 동창회를 하기 위해 막 옮겨간 모교를 찾아갔을 때 인천고교는 질척질척한 흙길을 걸어야 교문까지 갈 수 있었다.
주안동은 인천인의 삶을 가장 대표적으로 담고 있는 마을로, 필자 같은 토박이들에게는 상전벽해라는 한자성구를 실감하게 하는 곳이다.
2014년 02월 0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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