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5/문학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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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1. 17)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5
비류백제 도읍 문학산·문학동
개항 전까지 인천의 중심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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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에 복원된 인천도호부청사 내부에서 바라본 청사 아문(衙門). 아문 뒤로 문학월드컵경기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인천도호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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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문학동(文鶴洞)은 비류백제 도읍지로서 인천에서 가장 오랜 마을이라 이를 수 있다.
'미추홀은 인주(仁州, 고려시대 인천의 이름)이다'고 한 <삼국유사> 기록,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 또는 미추홀이다'라고 한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의 핵심 장소가 바로 문학산성과 그 아래 마을 문학동이기 때문이다.
문학산은 인천의 진산으로, 원래 이름은 남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곳 산성에 대해 '남산고성(南山古城)이라고 불리며, 돌로 쌓아 둘레가 430척'이라고 기록했다.
1842년 발간된 <인천부읍지>(2004년 인천역사자료관 복간)에 '일명 문학산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1863년 고산자 김정호가 남긴 <대동지지>는 '문학산이 남쪽 3리에 있다'고 문학산 명칭만 수록했다.
TV 드라마에서 자의성이 강한 작가의 상상력이 곁들여져 인기를 끌었던 소서노 이야기나 문학산성 축조형태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지표조사 결과 등은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여기선 근세부터의 지명 유래와 변천만 살피기로 한다.
모두 알고 있는 바처럼 지금의 문학동과 관교동은 1883년 개항 이전 인천부의 중심이었다.
<인천부읍지>는 오늘날의 문학동 일대를 부내면 산성리와 남산리라고 기록했다.
1889년 간행된 <호구총수>도 같다.
구분한다면 지금의 문학동 중심이 남산리인데, 문학경기장역쯤이 산성에서 가까워 산성리로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3년 남산리와 서촌산성리로 다시 바꾸고, 1906년에는 학산리와 산성리로 개명했다.
이때는 남산이라는 지명이 빛을 잃고 문학산이 지명으로 자리를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산은 인천부 관아 남쪽에 있어서 붙은 지명인데, 여러 고장에 같은 지명이 있으니까 구체성을 띤 지명으로 간 것이다.
1883년 개항으로 오늘날 해안동·중앙동·송학동 지역이 새로운 인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인천감리서도 그 지역에 세워졌다.
천년 이상 인천의 중심이었던 문학동과 관교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초기 부내면이라는 이름을 그쪽에 넘겨주고 구읍면이라는 행정지명을 얻었다.
일제가 1911년 작성해 발간한 <조선지지자료>는 오늘의 문학동 지역을 구읍면 학산리와 산성리로 올려놓았다.
이때부터 이곳은 '원인천'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1914년 4월 일제는 인천의 일부와 부평의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신설했는데, 그때 이곳 구읍면과 지난날 원우이면(遠又爾面)이었던 서면(西面, 오늘날 옥련·동춘·청학동)과 학익동(옛 지명 함박리)을 병합해 문학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학산리와 산성리를 합해 문학동으로 명명했다.
1940년 동네명을 일본식 정명으로 붙일 때 그냥 놔두었는데, 1940년에 결국 문학정(文鶴町)으로 바꾸었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문학동으로 회복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실린 오늘날 문학동의 저명한 지형지물은 문학산(옛 지명 남산)과 관산천(官山川, 우리말 '관산내'로 기록)을 둘 뿐이다.
문학산 정상에는 미추왕릉이 있었다고 전하나 흔적이 없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여러 차례 학교 소풍을 가서 정상에 올랐고 돌로 싼 성곽 흔적과 우물터를 본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은 미사일기지가 있어서 정상을 밟지 못한다.
가파른 벼랑 등산로 위에 성곽을 복원해 놓았는데, 옛스런 느낌이 없어 복원된 성벽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1970년대부터 인천향토사 연구를 시작한 선친을 모시고 여러 번 문학산과 문학동에 답사를 갔다.
군부대의 양해를 얻어 정상도 가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과 이별하며 세 번 불렀다는 사모지고개도 갔다.
돌로 쌓은 성곽, 우물터 등이 중학교 시절과 다름없이 남아 있었다.
농가 가운데 문학초등학교가 있고 관산천 맑은 물에 가재도 많았다.
1960년대 소풍 갔을 때와 바뀐 것은 미사일기지밖에 없었다.
세월이 더 지나 문학경기장을 지을 때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많은 곳을 놔두고 하필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던 저기 돌산을 파내고 운동장을 짓는다는 말이냐.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아버님과 답사를 다닐 때만 해도 문학산은 나무가 우거지고 오솔길을 찾기 어려워 오르기 힘들었다.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산에 올라 수백개 산길이 생기고 넓은 곳은 자동차가 달릴 만하다.
그때의 아버님만큼 나이를 먹은 지금, 문학산을 보면서 느끼는 건 인위를 가하면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이다.
2014년 01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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