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4/숭의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1.10)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4
日 군함 이름 따 '대화정' 명명
광복 후 '숭의동' 새 지명 얻어
|
▲ 숭의로타리에 전국체전 참가 선수들을 환영하는 꽃밭이 설치돼 있다. 1978년 모습으로 추정. /사진제공=김식만(치과의사)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남구 숭의동(崇義洞)은 조선시대 후반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長川里)였다.
1781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장천리 기록이 있다.
그때 이미 독각리(獨脚里)와 여의실(如意室)이라는 작은 마을도 있었고, 장천리는 지역을 대표하는 행정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기서 독각리(獨脚里.현 도원동)와 여의리(如意里)가 분리됐다.
1911년 간행 '조선지지자료'에는 장천리와 여기서 분동해 나간 독각리와 여의리(如意里)를 독립된 동네명으로 올려 놓았다.
1914년 일제는 부평과 인천 일부를 떼어내 부천군을 신설했다.
그때 다소면과 주안면을 합해 부천군 다주면(多朱面)이라 명명해 거기 포함시켰다.
그때 장천리와 여의리를 통합해 다주면 장의리(長意里)로 했다가 1936년 인천부를 확장할 때 편입시키면서 일본식 지명 대화정(大和町)으로 바꾸어 버렸다.
대화정의 일본어 발음은 다이와초.
태평양전쟁의 연합함대 기함으로 1945년 미군에 의해 격침을 당한 군함 이름에서 유래한다.
6만5000t, 길이 263m, 폭 39m, 46mm 포 등 25문의 함포와 7대의 함재기로 무장하고 3300명의 승무원이 탔던 '대화함'의 뜻은 야마토다마시(大和魂)에서 나온 것이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이 머리띠에 붉은 글씨로 썼던 대화혼은 일본 무사정신의 응축이다.
대화정은 인천 외에도 경성, 대구, 개성, 함흥, 김해, 통영 등 여러 곳에서 동네명으로 붙였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왜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회복할 때 숭의동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거룩하고 의로운 마을이라니 뜻은 좋지만 지명 유래가 실리지 않은 생뚱맞은 것이다.
장천리는 '조선지지자료'에 '장사래'라는 우리말 지명과 함께 수록됐다.
'사래'란 이랑을 나타내는 명사다.
이랑이 긴 개천이 여기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도원동 축구전용구장 앞 광성고교가 있는 산에서 흘러내린 개천이 굽이굽이 흘러서 도원동과 숭의동 일대를 적시고 바다로 빠져나갔다.
장사래 마을은 오늘의 숭의로타리 일대이다.
1942년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전 인항고교 한수영 교장선생님은 로타리 일대에 6·25 전쟁 후 미군기지가 있었고, 뒷날 영연방군 부대가 물려받아 주둔했다고 말한다.
지금 현대유비스병원이 앉은 곳에 대규모 군 주유시설이 있어 인천항에서 전방으로 가던 보급트럭이 줄줄이 늘어서 기름을 가득 넣었다고 회고한다.
거기까지 파이프라인이 지하로 매설돼 몰래 파고들어가 기름을 훔치고, 달리는 트럭에 뛰어올라가 보급품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그걸 소재로 20년 전 '까치산의 왕벌'이라는 중편소설을 썼다.
한 교장선생님은 또 숭의로타리에서 옛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직선의 길 양쪽에 일제 말에 판 큰 방공호가 있었으며, 거기 있는 우물에서 맑은 물이 넘쳐 수영을 할 정도로 깊고 넓었다고 말한다.
도원동 쪽으로 더 가면 왼쪽에 작은 마을이 있었으며 그 너머는 무논이었고, 경인철도가 지나가는 청과시장에서 옛 육상경기장까지는 물이 넉넉한 무논과 미나리꽝이었다고 기억한다.
여의실은 옛 인천교대 자리로 지금의 남구청과 그 주변이다.
인천의 명성 높은 토박이 가문 중 하나인 경주김씨 가문 고(故) 김은하 의원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이곳 토박이들은 여의실보다는 '여우실'이라고 불렀다고 회고한다.
지금은 밋밋한 언덕길인데 옛날에는 숲이 우거지고 여우가 많았던 것일까.
혹은 가문의 일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경주김씨 일가 기원을 담은 것일까.
우리나라에 '여의실' 혹은 '여우실'이라는 지명은 무수히 많다.
지명어원 연구의 권위자인 김병욱 인천대 명예교수는 '실(室)'이 골짜기를 의미하며, 우리 고유어 '늘어지다'의 어근 '어'에서 유래해 어의실>여의실로 음운변화한 것으로 '길게 이어진 골짜기' 의미로 보면 된다고 설명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여의리에 주미곡(周尾谷 우리말로는 건의꼴로 기록), 능내(陵內 우리말로는 능안으로 기록), 황곡(皇谷 우리말로는 황꼴골로 기록) 등의 골짜기가 있다고 올라 있다.
황곡은 지금 황굴고개라고 부르는 곳, 청과시장 앞에 있는 구릉이니 그 앞 골짜기일 것이다.
아무튼 여의실에는 그렇게 골짜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선지지자료'에는 수봉산(繡鳳山)이 '무릿재'라는 우리말 지명과 함께 실려 있다.
2014년 01월 10일 (금)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