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3/도원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1. 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3
'복숭아밭' 대신 화장터 있던 도원동
기와집 뉴타운 생긴 후 마을 밝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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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도원동(桃源洞)은 조선시대 후반 인천부 장천리(長川里)의 일부였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호구총수'는 이곳 동네명으로 장천리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이 장천리의 중심은 오늘날 숭의동이었다.
1903년 여기서 독각리(獨脚里)와 여의리(如意里)가 분리됐는데, 오늘날 도원동은 대부분 독각리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합방하자마자 지리조사를 한 결과인 '조선지지자료'(1911년 간행 추정)에는 장천리와 여기서 분동돼 나간 독각리와 여의리(如意里)를 취락 이름으로 올려 놓았다.
장천리와 함께 '장사래'라는 우리말 지명을 같이 수록했다.
우리말 고어사전을 보면 '사'란 이랑을 나타내는 명사였다.
이랑이 긴 개천이 여기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천리 이야기는 숭의동 편에서 하기로 한다.
그럼 독각리와 독갑다리라는 무슨 뜻일까.
'조선지지자료'가 한자기록을 독각으로 한 것을 보면 냇물 가운데 교각 하나가 박혀 있는 다리라는 의미로 보인다.
신태범 박사께서는 '인천 한 세기'에서 도원동 축구 경기장 위 언덕에 화장장과 전염병환자 격리 병원인 덕생원(德生院)이 있었고 그 아래로 개천이 흘렀는데, 거기 놓인 다리를 독갑다리라고 불렀다고 썼다.
그러니까 광성고교와 체육관으로 에돌아 올라가는 언덕 아래가 개천이었고, 그 개천 이랑이 사뭇 길어 지금의 축구전용구장과 공구상가를 거쳐 숭의동까지 뻗어가서 바다로 나갔다.
그 이랑이 긴 개천 상류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독각다리라고 했는데, 위아래 음절 밭침에 같은 자음 ㄱ이 이어지는 것을 꺼리는 이화작용에 의해 '독각>독갑'으로 변했다고 보는 게 옳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 옹기 가마가 있었고 개천을 타고 바다에서 올라온 배들이 독값 흥정을 한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숭의교회가 있던 자리를 도깨비산이라 했으므로 '도깨비다리'라는 뜻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독값 흥정은 호사가의 상상력 소산으로 보인다.
도깨비산도 그렇다.
도깨비가 고어로 독갑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필자 같은 인천 토박이들이 알고 있는 독갑다리는 숭의교회 쪽이 아니다.
오늘날 도원동 공구상가가 있는 곳이다.
1912년 5월 일제는 인천의 많은 동네 이름을 새로 붙였는데, 독각리와 장천리 일부를 묶어 도산리(桃山里)라고 명명해 버렸다.
지금 축구경기장 위 체육관과 광성고교가 앉아 있는 도원동 언덕에 복숭아밭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도산이란 임진왜란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新秀吉)가 통치한 시대인 도산시대를 기념하려고 지은 이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모모야마성(桃山城)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웅거한 곳이 후시미성(伏見城)이었는데, 그가 죽고 후시미성이 헐리자 그 터에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모모야마성으로 바뀐 것이었다.
거기서 유래해 도요토이 히데요시 통치기간을 '모모야마(桃山) 시대'라고 부른다고 일본의 역사 자료는 설명하고 있다.
한심한 것은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일본식 동네 명을 우리말로 복원할 때 도원동이라고 한 것이다.
야산 아래로부터 들판을 가르며 바다를 향해 굽이굽이 길게 뻗어간 개천이 있었음을 노인들이 기억하고, 1937년 정회(町會) 규정에 따라 동네 명을 일본식으로 일제히 바꾸기 전부터 도산리라고 불러왔으므로 그걸 재래 지명으로 오해해 마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신선의 경지'를 연상하게 하는 지명을 냅다 붙인 것이다.
도원동에 사는 분들은 싫어할지 모르지만 도원동은 그런 신선의 경지와는 정반대 장소였다.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 폐질환(廢疾患) 병원인 덕생원과 화장터가 거기 있었다.
신태범 박사는 위의 책에서 '매우 음산한 지역'이었다고 썼다.
일제강점기 후반 그런 이미지는 일신됐던 듯하다.
1936년 화장터를 옮겨가고 그 자리에 공설운동장을 만들었고 12번지 일대에 기와집 40채로 된 뉴타운을 세웠던 것이다.
그 집들을 부영(府營)주택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시영주택과 같은 의미다.
그때부터 마을이 밝아졌다고 원로들은 기억한다.
부영주택 하나에 1939년 신의주 감옥에서 나온 죽산 조봉암 선생이 세 들어 살았다.
광복 후 거기서 제헌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초대 농림부장관이 됐으니, 독갑다리 개천은 '개천에서 용 나는' 상서스러운 곳이었다.
인천이 배출한 불세출의 인물 죽산 선생이 날개가 꺾여 법살을 당하고 돌아가실 때 주소는 이곳이 아니고 서울이었다.
2014년 01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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