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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2/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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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27)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2
불행한 첫 만남 … 평등조약으로 관계개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끝)
신미양요 10년 뒤 자유공원'탱고 스튜디오'자리서
해관史 연구가 김성수씨 자료 발굴·본보 특종 보도
화도진·파라다이스 호텔 등 체결 장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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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미국과의 첫 만남은 불행했다.
1871년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미국 아시아함대 일부 전력이 먼저 벌어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 아래 강화도에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그 신미양요 때 조선군은 어재연 휘하 장병 대부분인 350여 명, 미군은 단 3명만이 전사했다.
사실 신미양요는 전쟁이 아니었다.
그래서 '양요(洋擾)'라 한다.
현대적 의미의 전쟁은 국가 간 총력전인 바, 신미양요는 일개 해군 사령관의 자의적이자 일방적인 공략이었다.
후에 사령관 로저스는 미 국회 청문회에 나가 질책을 당했다.
그 후인 1882년 미국 전권대사 자격으로 인천항에 온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1~1895) 제독과 조선국의 전권대신 신헌이 인천항에서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평등 조약이었고 앞날 양국 관계 개선의 초석이었다.
구체적인 조약 체결지는 향토사가 최성연 선생이 유저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화도진'이라고 주장한 것이 정설처럼 돼 인천시가 화도진에 공원을 조성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비'를 세우는 한편 화도진 내부에 일부 자료를 전시해 왔었다.
연전에 성김 주한 미국 대사까지 이곳을 다녀가는 등 화도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한미 외교사의 출발지로 알려져 왔었다.
이를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오류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음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개항 초기 역사적 소재를 인천 지역에서는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지역 인문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지역사 연구가 비로소 역사학 전공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근자의 일이고, 광복 후 역대 어느 시장도 그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역사 발굴의 주인공은 국세청 서울세관의 해관사(海關史) 연구가 김성수씨다.
그는 이미 초기 인천해관 문서 번역본을 출간해 지역사 연구가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번에 별도의 문서를 발굴하는 한편 그에 속한 지도를 공개했다.
본보는 그동안 국내 외교사 연구가들조차 확정하지 못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특종 보도'를 했다.
1882년 5월22일 신헌을 대표로 한 조선 정부가 서양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구체적인 장소는 이렇게 드러났다.
그에 앞서 이의를 제기한 이는 '내리교회110년사'의 저자인 박철호 전도사이다.
그는 1892년 2월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아펜젤러 목사가 쓴 '한국의 개국-슈펠트 제독의 증언'에 주목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스와타라 호 선장이었던 쿠퍼가 나에게 말하길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현재 해관 세무사의 영빈관 자리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는 존스 목사가 훗날 인천에 거주했던 쿠퍼에게서 들은 "제물포에 있는 세무사 거주지 뒤쪽 언덕배기 자리"와도 일치한다.
아펜젤러 목사와 존스 목사 증언에 따라 해관 초대 세무사 영국인 스트리플링의 거주지가 초창기 인천해관이 있던 오늘날의 중구 북성동 파라다이스 호텔 자리였을 것으로 잠정적으로 추정하는 한편 "화도진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밝힌 바 있다.
제1차 체결지 비정보다는 한결 진전된 것이어서 '인천향우회'가 서둘러 파라다이스 호텔 구내에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라는 표지석을 2006년에 세웠는데, 이번에 발굴된 1889년 작성 '제물포 지도'에 초대 세무사 거주지가 또렷이 명기돼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조약 체결지를 확정한 것으로 그간의 긴 여정은 문제점은 있었으나 피치 못할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한 도시가 높은 품격을 갖자면 무엇보다도 인문학 연구 중에서도 '역사'에 방점을 두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제도와 인력 보강, 연구비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1 체결지로 알았던 화도진 공원
향토사가 최성연 선생의 주장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사학과 교수 등이 동조하고 나섬에 따라 인천시가 화도진공원을 대대적으로 조성하고 '조약 체결지'로 공식화했다.
공원 내 조약 체결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2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비
화도진공원에 세운 '체결지 비'.
1882년 이곳에서 조선 정부 전권대표 신헌과 미국의 슈펠트 제독이 조약문에 서명했다고 적고 있다.
3 새로 세운 또 하나의 기념비
종교사 연구가 박철호 전도사 주장에 따라 인천향우회가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 현관 앞에 기념비로 새로 세웠다.
이로 인해 인천에는 두 개의 조약 체결지 비가 있게 됐다.
4 '인천해관' 문서 속 지도 발굴
관세청 서울세관의 해관사 연구가 김성수씨가 최근 발굴해 본보에 제공한 지도이다.
각종 증언 자료와 이 지도가 일치한다.
이로써 조약 체결지는 지금의 자유공원 '탱고 스튜디오' 자리임이 밝혀졌다.
5 현재의 '탱고 스튜디오' 모습
해관 지도 속에 나타난 '해관장 숙소' 자리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옛 극동방송(HLKX) 연주실이 있던 곳으로 기억되는 장소이다.
향후 '표지석' 등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6 신헌 조선 대표와 슈펠트 제독
조약 체결 당사자들이다.
쿠퍼 선장 증언에 따르면, 미국은 조약 체결지로 "스와타라 호에서 바라보이는 언덕배기"를 상정했다고 한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일보 사진부
2013년 12월 2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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