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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2/송현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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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27)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2
수도국산 비탈 산동네 송현동
개항장서 밀려난 서민의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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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현 근린공원 내에는 인천 최초 상수도시설인 송현배수지와 달동네의 옛 모습이 재현된'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공원 내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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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송현동(松峴洞)은 그 뿌리를 오늘날 수도국산이라고 부르는 만수산(萬壽山)과 송림동에 두고 있다.
18세기 후반 간행된 <호구총수>와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오늘날 동구 지역 대부분이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다가 1903년 여기서 우각리(牛角里 현재 창영·율목·금곡동)와 송현리가 분리돼 나갔다.
1911년 발간된 <인천지지자료>에도 분리된 동네명으로 송현리가 실려 있다.
1883년 개항으로 인천 인구가 팽창했다.
개항장 지구에 살던 조선인들은 상권을 장악한 중국인들에게 떠밀리고 거류지를 빠르게 확대해 간 일본인들에 밀려나 송림리 지역에 새로운 마을들을 형성했는데, 1920년대에 그 지역을 '북촌'이라고 불렀다.
인가가 없고 소나무숲이었던 송림리의 만수산 비탈에도 마을이 들어섰고 새로운 동네명이 필요해 소나무숲고개라는 의미로 송현리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1924년 6월 잡지 <개벽>에 실린 글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에는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에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송현리의 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표면상 남 보기에는 북부 일부도 번성하여 오는 것같이 보이는 지금의 송현리 송림리 등의 신설부락, 요철불일(凹凸不一)한 산비탈 게딱지 같은 속으로 기어나고 기어들어가는 그들의 참상을 보아라.'
신설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 송현 혹은 '소나무숲고개'라는 지명은 없었다.
<인천지지자료>의 인천부 내 영치현(嶺峙峴) 이름으로 이곳 송현은 올라 있지 않다.
송현은 인천의 다른 곳 지명으로 올라 있다.
충훈리(忠勳里, 현 주안동 관교동 일대)에 위치한 고개로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수산 구릉의 소나무를 잘라내고 새로운 빈민 마을이 앉은 터라 그냥 송현리라 새로 지어 불렀다.
6·25 전쟁 후 월남한 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을 잡아 송현동 인구는 더 늘어났다.
판잣집들이 산 전체를 덮어 1960년대에는 그 유서 깊은 소나무숲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1970년대까지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로 이어져 왔고, 그런 연유로 뒷날 달동네박물관이 세워졌다.
오래된 전래 지명이 아닌데도 송현리는 영욕으로 가득한 근대사 격변 속에서도 지명을 용케 그대로 유지했다.
1937년 일제가 전국의 지명을 일본식 정명으로 바꿔, 광복될 때까지 8년간 송현정으로 불렸을 뿐이다.
1950년 화수동의 일부를 합해 1,2,3,4동으로 분동되고, 1, 2동이 합해 하나의 행정동으로 되는 변화는 있었으나 송현이라는 지명은 1903년 전후 명명돼 110년 동안 이어졌다.
본래부터 지명이 있던 주안 쪽 송현은 오늘날 지명이 사라지고 그냥 무난하게 갖다 붙인 송현동 지명이 살아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송현동의 특징을 지닌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수도국산의 상수도 배수지, 수문통, 중앙시장(속칭 양키시장)일 것이다.
개항 이후 인구팽창으로 인천에는 식수가 부족했다.
1905년 인천항 일본민단소 민장인 도미타 코지(富田耕司)는 문학산 계곡에 빗물을 저장해 식수를 쓸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 않고 서울에서 한강물을 끌어오는 것으로 선회했다.
그리하여 송림리와 송현리에 걸쳐 있던 만수산에 배수지를 만들고 노량진에 정수시설을 만들어 1910년 12월부터 수도급수를 시작했다.
수도시설이 있어 너도 나도 수도국산이라고 부르다 보니 본래의 만수산 지명은 실종됐다.
1934년 신화수리(현 화수동) 해안과 송현동 사이에 둑을 막고 매립을 해서 면적이 늘어났다.
오늘의 송현3동인데,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수문통은 그때 제방에 만든 장치였다.
송현동 해안에서 배다리까지 이어진 갯골을 타고 들고나는 조수와 하수를 조절했던 것이다.
한편 이 일대는 분뇨를 처리하는 곳이기도 해 '똥바다'라고도 불렀다.
1937년에는 송현동에 일용품 공설시장이 들어섰고, 그것은 오늘의 중앙시장과 송현시장으로 확대됐다.
송현 1,2동은 100년 전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송현 3동은 갈대 해안과 갯벌을 매립한 곳으로, 인천 동구의 거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면적이 넓다.
오늘날 송현동에는 송현이 없다.
그러나 마치 격랑과도 같은 근현대사 애환을 겪으며 살아온 인천인들의 고향이며 그 흔적은 달동네박물관에 남아 있다.
2013년 12월 2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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