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1/신식 학교의 등장(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12.20)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1
서당에서 학교로 … 새교육 바람이 불다
근대 문물의 수용(3) 신식 학교의 등장
1892년 내리교회서 산수·영어 등 가르쳐
'영화학당' 등 인천서 근대학교 속속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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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전까지 인천의 교육을 감당해 온 교육기관은 몇몇 향교와 서당이 고작이었다.
이 중 향교는 도호부의 관할 하에 학동을 가르쳐 왔으나, 1894년 고종황제가 과거제도를 폐지하자 예부터 해 왔던 문묘 향사(享祀)에 주력하면서 교육기관으로의 기능은 약화됐다.
서당은 일반 백성들의 자제를 교육시킨 사학(私學)이었다.
수학 연령은 8~9세에서 15~16세로 다양했지만, 입문서는 '천자문'이었다.
훈장이 '하늘 천, 따 지' 하고 읽으면, 학동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읽는 소리가 온 동네에 합창처럼 낭랑하게 퍼졌다고 전한다.
댕기머리들이 '천자문'을 다 떼고 나면, 훈장의 노고를 치하하고, 글을 처음 배운 학동들을 격려하기 위해 떡 등을 해 가지고 와 책거리를 했다.
그 후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독서의 폭을 넓혀 갔는데, 당시 훈장의 교수법은 온 세상사를 넘나드는 '전인적 교육'이었다.
그러나 서당의 교육과정은 세상 현실에 나아가 대응해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학습의 대부분의 과정은 '읽기'와 '쓰기'였고, 신식 필기구가 없어 대나무 붓으로 '사판(沙板)'에 글씨를 썼다 지우거나, 붓에 먹물 대신 물을 적셔 '나무 서판(書板)' 위에 썼다가 마르면 다시 쓰곤 했다.
1892년 내리교회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 신교육이 시작되자 교육에 혁명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학습용구로 학동들에게 공책과 연필이 나누어졌고, 음악시간에는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수업과목도 서당과는 달리 산수, 영어, 성경, 지구약론, 바느질 등이 등장했다.
존스 목사와 그의 부인이 남자 3명, 여자 2명을 모아 시작한 영화학당은 1894년 건물을 6칸으로 늘리는 한편 학교 이름을 정식으로 '영화학당(永化學堂)'이라 짓고, 남학생 50명, 여학생 20명을 가르쳤다.
이것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이었다.
영화학당 학생들은 단발머리에 흑색 교복을 입는 등 개화에 앞장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미국에서 기증을 받은 나팔, 북, 소총 등을 갖춰 애국심 고취운동의 하나로 제식훈련 등을 실시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갑오경장이 단행되고, 고종 황제가 교육에 관한 조서(詔書)를 내렸다.
황제 자신이 신교육을 강조했고, 그 같은 교육입국의 정신에 따라 근대식 학교의 법규와 규칙이 제정, 공포됐다.
그에 따라 인천에서 신식 학교가 속속 설립됐다.
인천 첫 관립 학교는 외국어(外國語) 학교였다.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류에 필수적인 외국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학부아문(지금의 교육부)이 1895년 6월 인천감리서 안에 직접 세웠다.
정식 명칭은 '관립외국어학교 인천지교'였다.
초기 수업 연한은 3년이었고,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이 학교는 뒤에 인천상업학교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고, 광복 후 인천고등학교(仁川高等學校)로 명맥을 이었다.
순수 민간 사립학교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濟寧學校)'였다.
인천신상협회의 서상빈(徐相彬) 사장이 세워 인천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일꾼을 기르고자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쳤다.
설립 당시 자금이 부족해 제물포해전 때 자폭한 바략 호를 인양해 거금을 쥔 김정곤(金貞坤)씨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녕학교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그 명맥도 계승하지 못해 인천 학교사의 아쉬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세운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등학교)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 학동의 교육을 위해 세운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전교생들이 나서서 인천 지역 최초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정신사적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현재 인천에는 600여 초·중·고등학교가 있으나 굳이 이 학교들을 골라 소개한 것은 인천의 신교육 초창기에 그들이 감당했던 선구적 의미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 전통의 맥을 이어 오늘 각종 교육기관이 인천의 자제들을 기르고, 키워 이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 과거 서당의 모습
조선 후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아이들이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다.
2 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07년 4월3일 개교했다.
광복후 인천창영초등학교로 개명했다.
지역사회 각계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교다.
3 관립외국어학교 인천지교
1895년 6월27일 인천감리서 안의 경찰관 사무실(지금의 중구 내동 85번지)을 빌려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수차례 교명을 바꾸었으나 명문교로서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인천고등학교가 되었다.
4 영화학당의 수업 광경
영화학당은 1892년 3월12일 지금의 내리교회 구내에서 존스 목사와 강재형 전도사 부부가 남자 어린이 3명, 여자 어린이 2명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출발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한복을 차려입고 공부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5 영화학당의 집총 고적대
민족의식 고취 차원에서 운영한 영화학당의 집총 고적대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인천고등학교, 영화초등학교
2013년 12월 2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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