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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 지명考-21/송림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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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20)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1
만수산 기슭 소나무숲 송림동
근대사 격변에도 이름 지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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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송림동(松林洞)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지명 중 하나이다.
1789(정조13)년 간행한 것으로 보이는 <호구총수>에 인천부 다소면의 동네명으로 실려 있고, 1871년 출간한 <인천부읍지>에도 올려져 있다.
그 후 우각리(牛角里, 현재 창영·율목·금곡동)와 송현리(松峴里)가 분리돼 나갔다.
송림리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인 만수산(萬壽山, 속칭 수도국산)에 소나무가 울창해 지어진 것이다.
그렇게 분명한 지형적 특성을 안은 터라 아주 드물게 200여 년간 지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1907년과 1912년 부내면 다소면 동네명을 바꿀 때, 1914년 지명개정 때도 그대로 살아남았다.
1937년 1월 15일 정회(町會)규정과 함께 일제히 일본식 정명으로 바꿀 때 인천부 전체 100여 동네 중 대부분 일본의 왕족, 장군, 군함 혹은 일본에 흔한 동네명 등 생소한 지명을 갖게 됐으나 그냥 송림정으로 살아남았다.
1950년 1월 1차로 1,2,3,4동으로 분동되고, 1970년대에 5,6동으로 나뉘었을 뿐이다.
옛 송림리는 일부를 오늘날 창영·율목·금곡·송현동을 떼주고도 면적이 사뭇 넓었고 몇 개의 자연취락들을 안고 있었다.
1911년 간행한 <조선지지자료>에는 송림리라는 지명 외에 송림리 권역에 들어 있었음이 확실한 몇 개의 지명들이 실려 있다.
송내촌(松內村 솔안말), 매화지(梅花址), 신촌(新村 새말), 간촌(間村 샛골), 만취당(晩翠堂) 등이다.
그런가 하면 안송림말, 바깥송림말, 샛골 등 노년의 인천토박이들이 기억하는 오랜 지명들이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송내천'은 안송림말이다.
수도국산 동남사면에 가장 먼저 생긴 자연취락으로 오늘날 송림2동 지역이다.
마을 모습이 매화를 닮은 형상이어서 '매화마을'이라고도 했다고 전해진다.
'매화지'는 이곳에 있던 정원으로 보인다.
혹은 매화정원이 있어서 매화마을로 불렀다고 말하는 원로들도 있다.
만취당은 조선중기에 인천 만수동 출신인 성리학자 이숙(李淑 1574~1628)이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던 정자이다.
<조선지지자료> 가 동네명 항목으로 적었으므로 '매화지'와 '만취당'도 서로 구별되는 작은 취락이자 안송림말의 일부였으리라 짐작된다.
신촌은 인천개항으로 인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개항장지구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늘어나서 그 세력에 밀려난 조선인들이 새로 터를 잡은 새로운 동네였다.
간촌은 토박이들에게는 샛골로 익숙하게 알려진 곳으로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다는 뜻이었다.
동산고교 건너편 오늘의 송림3동 지역이다.
8·15 광복 전후 부자동네로 소문이 났던 곳인데, 필자 기억을 더듬으면 1960년대 초까지 넉넉하고 윤택해 보였으나 내동이나 율목동의 고래등 같은 큰 기와집들은 별로 없었다.
송림리는 일제강점기 개항장에서 한참 떨어진 순조선인 거류지였고, 샛골은 그 지역 중에서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송림동으로도 공장들이 밀려 왔다.
대표적인 것이 노다장유(野田醬油)라는 간장공장과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이다.
지금의 송림1동 지역, 배다리에서 송림로타리로 가는 오른쪽 길가에 무너진 간장공장 시멘트 탱커 흔적들이 있었던 것을 필자는 기억한다.
조선인촌은 거기 인접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데, 자료를 보니 정확한 위치는 금곡리 32번지이다.
1936년 8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인촌공장 소음이 크고 연돌에서 매연이 날아와 송림리에 사는 주민들이 고통스러워한다는 내용이 있다.
송림2동인 현 동구청 자리에는 1960년대에 시립도살장이 있었다.
누런 소들이 '움메' 하고 울면서 끌려 들어갔고 비오는 날이면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그리고 주변에 양은공장이 많았다.
'쌔애앵'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큰길까지 울려 나왔다.
노란 양은 판을 모터 머리에 붙이고 돌리다가 목형 틀을 들이대면 순식간에 양은그릇이 만들어져 나왔다.
송림4동은 부처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재능대학이 있는 언덕이 부처산이다.
1960년대까지 안송림말에도 활터가 있었지만 여기에도 있었다.
그래서 활터고개라고 불렀는데 고개가 높아 헐떡거리며 올라간다는 민간어원설이 엮여 헐떡고개라고도 했다.
2013년 12월 2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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