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9/개화물결 넘실(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12. 6)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9
개화물결 넘실 … 새로운 생활에 눈뜨다
근대 문물의 수용(1) 등대·전화·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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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인천 개항은 싫든 좋든 이 땅에 크나큰 물결로 들이닥쳤다.
"제물포는 도성의 인후라, 이곳을 개항하면, 나라를 내 주는 것과 같사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외쳤던 최익현 선생의 사자후도 그 개화의 노도 속에 휩쓸려 묻히고 말았다.
일본과 청국을 비롯해 동서의 이양선(異樣船)들이 인천항에 닻을 내리자면, 팔미도를 지나야 했다.
특히 일본은 1901년 체결한 '통상장정'에 "각항(各港)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했다.
그렇게 이 나라 최초의 등대는 일본에 떠밀려 세웠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82년 3월이었다.
청국에 파견된 유학생 상운(尙澐)이 귀국하면서 2대를 가져왔다.
이 개명의 이기를 그 무렵에는 '덕률풍(德律風)'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영어 '텔레폰'에서 음만 취해온 가차명(假借名)이었다.
전화기가 정식으로 도입된 때는 그 한참 뒤인 1894년 1월이었다.
궁내부에 전화를 설치하기 위해 정부가 동경에 주문한 전화기가 인천해관에 도착해 큰 관심을 모았고, 그해 3월1일 전화기를 시험과 동시에 그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참관인들은 탄성을 자아냈으나 어수선한 정세로 정작 전화기가 궁내부에 개통된 때는 4년 뒤인 1898년 1월이었다.
지금의 시장 격인 인천감리가 전화로 "오후 3시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외아문(外衙門)에 보고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용이었고, 일반인들은 1902년 3월이나 돼야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소속 재외우편국이 불법으로 인천-서울 간에 전화를 가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통신원이 이날을 기해 서둘러 사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로써 인천은 관용, 공중용 전화가 최초로 가설된 전화 사업의 시발지로 우뚝 서게 됐고, 광복 후 공전식, 자동식을 거쳐 전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해 통신서비스의 대중화에 기여한 도시로 됐다.
아득한 옛날 인류의 시간은 낮과 밤 두 가지뿐이었을 것이다.
그 후 수많은 세월 후 불을 사용해 어둠을 밝힐 수 있게 되자 밤 시간을 나누어 쓰게 됐지만, 우리나라에서 때를 알리는 시보(時報)가 확립된 것은 조선 예종 당시 종이나 북을 쳐 시각을 알린 게 처음이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가장 왕성한 낮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그 정점인 정오를 백성에게 알려 휴식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마련한 시보가 이름하여 '오포(午砲)', 즉 정오에 헛대포를 한 방 놓는 것이었다.
1세대 향토사가 고일 선생은 유저 '인천석금'에서 "오포는 인천중학교 뒤쪽 산허리 숲속에 있었다.
그래서 인중(仁中) 뒷산을 오포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오포는 사고를 내는 일도 잦았다.
1915년경에는 오발로 관측소 오포수(午砲手)가 손가락 8개를 잃는 사고를 당했는가 하면, 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대포를 쏘지 못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5년경 오포제가 폐지되면서 만국공원 홍예문 위에 인천소방소 감시탑에서 싸이렌을 울리는 것으로 정오 시보(時報)를 대체했다.
1960년까지 울렸던 이 '싸이렌 시보'는 오늘날까지도 시민들에게 추억의 소리를 들려주는 듯싶다.
1 한국 제물포 전화도본(電話圖本)
대한제국 통신원이 인천과 서울 사이에 전화를 개통하기 전에 작성한 '전화도본'의 일부이다.
각국 조계지 오른쪽에 전화소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경인간의 전화는 1898년 1월 이전에, 일반 전화는 1902년 3월20일에 개통했다.
2 전화 교환수
인천과 서울 사이에 전화가 놓이면서 양쪽의 전화를 이어주는 교환수가 등장했다.
작은 교환대 앞에 앉아있는 상투 튼 교환수 모습이 시대적 정황을 말해준다.
여성이 교환수로서 등장한 것은 전화가 일반화된 한참 뒤의 일이다.
3 소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길을 밝힌 곳은 인천이다.
1902년 인천에 해관 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 각각 완공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며, 2003년 해양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4 인천측후소와 천문대
중앙기상대로서 전국의 측후소를 관할했던 인천측후소에 소규모의 천문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아래 기슭에 우리나라 최초의 '오포대'가 있었다.
5 국내 최초의 오포대(午砲臺)
오포는 정오에 대포 한 방을 쏘아 시간을 알려준 시보였다.
인천에서 처음 발사된 것은 1906년 2월9일이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오포로 기록된다.
6 에릭슨 벽걸이형 자석식 전화기
궁 내부에 가설했던 초기 전화기와 동일한 모양으로 현재 중구청 앞 인천개항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인천개항박물관, 중구청, 터진개 황금가지 이종복 대표, 필자.
2013년 12월 0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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