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9/율목동과 유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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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 6)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9
'밤나무골' 율목동과 '버들골' 유동
일본인 묘지서 한옥촌 부자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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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공립상업학교 /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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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율목동(栗木洞)과 유동(柳洞)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의 일부였다.
19세기 후반에 나온 몇 권의 『인천부읍지』는 다소면의 동네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율목동과 유동은 없다.
필자 선친은 『인천지명고』(1993)에서 율목동이 조선 후기 다소면 송림리(松林里)의 일부였으며, 1903년 여기서 우각리(牛角里)와 송현리(松峴里)가 분리돼 나가고 1907년 우각리가 다시 우각동·율목동·금곡리로 분동됐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1912년 우각리에서 유동이 떨어져 나갔다고 썼다.
경인철도가 우각리를 관통해 행정 편의상 분리했다는 것이다.
한편 1908년 일제가 인천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제멋대로 지명을 붙인 기록에 처음 유정(柳町, 일본어 발음 야나기쵸)이 등장한다.
이곳이 오늘날 유동은 맞는데, 율목동까지 모두 포괄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1911년 강제합병 직후 출간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지지자료』에는 율목동·금곡동·우각동이 새로 만들어진 부내면의 동네로 그대로 올라 있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도 살펴본 바 있지만 인천부의 부내면은 원래 원인천의 행정 중심인 현 관교동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개항 이후 그 이름을 개항장 일대로 넘겨주고 구읍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개항과 강제합병을 전후한 어수선한 시기에 지명도 그렇게 어수선했다.
정황으로 보아 인접한 율목동과 유정은 조선인촌과 일본인 거류지여서 제 각각 우리말 전통 지명과 일본식 지명으로 나뉘어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율목동과 유동의 지명유래는 '밤나무가 많은 동네',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가 분명하다.
필자는 1960년 인천고가 병설한 상인천중에 입학했는데, 학교 뒤편 언덕길에 사는 노인들이 하나같이 '밤나무골', '버드나무골' 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지명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밤나무골은 자연취락 이름이 아니라 민가 서너 채 있음 직한 한적한 밤나무 숲이었던 것 같다.
일부 인천 향토사 관련 글은 밤나무골이 개항 당시, 혹은 1910년대부터 부자 동네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그렇게 보기 어렵다.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에 의하면 대한제국 말기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李夏榮, 1858~1919) 소유의 임야, 영국 유학파 축구인이며 서상집 인천 감리의 아들인 서병의(徐丙義, 1893~1946)의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신흥동 신생동 일대 일본인 거류지의 묘지가 비좁아 새 토지가 필요하자 이하영의 땅은 답동의 일본인 토지와 교환하고 서병의의 땅은 매입함으로써 이곳은 묘지가 되고 화장장도 들어섰다.
밤나무골 언덕이 모두 묘지와 화장장은 아니었다.
1932년에 일본인들이 만든 『인천향토지』(2005, 인천역사자료관이 복간)에는 1920년 조선식 온돌 25칸을 갖춘 공동숙박소가 문을 열었고, 1929년 강화 전등사의 인천포교당이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공동숙소는 1923년 노동자야학을 열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있다.
구릉의 남쪽,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중국인 우리탕(吳禮堂)의 별장이 있었다.
그런데 뒷날 그가 죽은 후 인천에서 무역업과 정미업으로 떼돈을 번 리키다케 레이하치(力武平八)의 소유로 됐으며 뒷날 인천부립도서관이 거기 들어섰다.
일본인 묘지 일부는 광복 후에도 남은 것 같다.
1946년 1월 대중일보를 보면 율목동 언덕에 임오군란과 러일전쟁 제물포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이 묻힌 '육군묘지'와 공동묘지를 어서 파 가라고 임홍재 시장이 요구한 기사가 나온다.
쿠리기쵸(栗木町)라는 일본식 지명을 버리고 율목동으로 회복된 직후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세기』 회고에 의하면 그 후 율목동에 한옥 20여 채가 들어선 뉴타운이 만들어졌다.
서울 명륜동 한옥마을을 본뜬 것으로 장광순 전 인천부의원, 내리교회 김기범 목사, 상공회의소 최정환 선생, 환일정미소의 주원기 선생 등이 입주했다고 신 박사는 회고했다.
율목동이 부자동네로 불린 것은 이때부터로 봐야 한다.
그때 한옥은 아직 몇 채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밖에 율목동 명물로 1917년에 건축한 남공립상업학교 본관이 있었다.
일본 요코하마(橫浜)의 명물 아카렌카(붉은 벽돌) 창고보다 더 멋들어진 건물을 뒷날 인천고가 이어받았는데, 인천은 어리석게도 그걸 헐어버렸다.
필자가 6년간 공부한 그 유서 깊은 건물은 추억 속에만 남아 있다.
2013년 12월 0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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