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7/제물포해전의 오해와 러시아 추모비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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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1.22)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17
제물포해전의 오해와 러시아 추모비
조선 영토 차지하려 벌인 러·일 전쟁
러 "인천에 전후처리 도움 받았다"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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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9일, 인천 앞바다 팔미도 해상에서 일본과 러시아 함정간의 해전이 벌어진다.
제물포 해전 당시 바랴그 호 함장 '루드뇨프'는 "항복은 생각할 수 없다. 끝까지 싸워 순양함도, 우리 자신도 넘겨줘서는 안 된다"며 12시에 팔미도 해상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 함대의 집중공격을 받고 항구로 후퇴해왔다.
이때 장교 1명, 수병 33명이 사망하고 중경상자 196명이 발생했다.
제물포해전에 대한 오해의 출발은 전후처리에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 측이나 우리 측은 당시 인천사람들이 러시아 병사들을 구조하는 데 도움을 줘, 그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며 연안부두에 '제물포해전 추모비'를 세우게 했지만, 그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의 지배권을 갖겠다며 오만방자하게 남의 나라 내항에서 싸운 상황에서 인천 사람들은 거기에 끼어들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었다.
부상병은 일본군의관들이 1차 진료를 한 후 인천 일본적십자병원에 머물다가 일본 송산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그 중 중상자 2명이 사망해 인천에 묻혔다.
최근 필자가 찾아낸 일본 에히메신문사 전 이사 객야등박(客野燈博·갸쿠노 스미히로) 씨의 르포에 의하면 포로 22명을 수송한 배는 병원선 '박애환(博愛丸)'이었고, 그 지역 다카하마(高浜)에 1904년 3월10일 밤 12시에 도착해 임시보호소에 수용했다.
그들은 중상자는 들것에, 경상자는 간호부 등이 부축해 하선시켰다.
여기서 갸쿠노 스미히로 씨는 이들이 영국과 프랑스 함정에 의해 구출됐음을 다시한번 밝히고 있다.
일본은 중상자 9명, 경상자 13명에게 흰 담요를 지급하고 1인 1실에 재웠다.
다리가 절단된 이가 4명, 한 손이 없는 병사가 1인이었다.
수용소의 위치는 마스야마의 성산(成山) 동쪽 기슭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전 세계에 '인도주의 일본'을 선전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계란과 비스켓 등을 전해 주도록 했고, 자유로운 산책, 트럼프 놀이, 성서 읽기, 일본어 배우기 등을 시켰다.
치료를 끝낸 이들은 고베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을 통해 본국으로 송환해 주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친척과 다름없이 대해줘 이를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찬사를 들었다고 자화자찬 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제물포해전을 열렬히 기리고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러시아로서는 분명한 패전이요, 조선을 지배하겠다고 나섰다가 일본에게 졌고 그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식민통치로 이어졌던 것이 제물포해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2004년 국영 TV에서 러일전쟁 100주년 특집방송을 하면서, 바랴그 호 병사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했다고 선전했다.
마치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꼴라이 2세가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인천에 와 취재 경쟁에 열을 올리는 모습도 일본이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을 범국가적으로 기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제물포해전 추모비'를 세우게 해줬던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두 나라가 갖고 염치없는 해전을 벌였음에도 말이다.
오늘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국민 애국심 고양사업 위원회'를 만들고 자신이 위원장을 맡아 바랴그 호 깃발 순회 전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허수히 볼 일이 아니다.
러시아는 1989년 9000t급 최신형 순양함 바랴그 호를, 2003년에는 1000t 급 잠수함 초계정 코리예츠 호를 건조했고, 같은 해 바랴그 호 함장 '루드뇨프'의 동상을 그의 고향 '뚤라' 시에서 건립했다.
1 제물포해전 상황도
일본 해군이 작성한 제물포해전 상황도.
인천 앞바다 팔미도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던 일본 측 순양함 치요다, 아사마, 나니와 등과 러시아 측 군함 바랴그 호, 코레츠 호 등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2 자폭한 전함 바랴그 호
제물포해전은 러일전쟁 당시 러일이 1904년 2월9일 인천 앞바다에서 벌인 첫 전투이다.
열세였던 러시아 함들은 항복하지 않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당시 자폭한 코레츠 호의 폭발음이 인천 시가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3 일본의 군함 송도함
러일전쟁 당시 일본 승전의 주역이었던 송도함의 모습.
이 군함은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물포해전'에도 참가했다.
군함 후미에 '욱일기'를 달고 있다.
4 러시아 부상병들
제물포해전 후, 일본은 인천의 임시 적십자병원에서 러시아 부상병을 치료했다.
이는 일본이 인도주의적 국가임을 선전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1905년 3월에 촬영한 이 사진은 대외 선전용으로 배포됐다. 부녀 간호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5 러시아 수병 장례식
적십자 병원에서 치료받던 러시아 수병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장례식을 엄숙히 치러주었다.
프랑스에서 발행한 사진엽서의 사진이다.
오른쪽에 도열한 일본군이 '욱일기'를 앞세워 들고 있다.
6 바랴그 호 인양 작업
자폭 침몰한 바랴그 호 잔해를 인양하는 장면이다.
인양 작업을 통해 큰 돈을 번 조선인 김정곤 씨는 후에 인천 최초의 민간학교인 제령학교의 설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일본 해군성, 인천시립박물관, 프랑스 사진엽서, 필자
2013년 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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