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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7/만석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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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1.22)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7
인천 마지막 쪽방촌 '괭이부리말'
만석동에 서린 근대·산업화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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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동 쪽방촌의 모습. 주민들 중 일부는 보금자리주택에 입주했지만 100만원 정도의 보증금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쪽방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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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만석동(萬石洞)은 돌도끼와 돌칼 등 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완만한 갯벌지대여서 해안에 선사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됐던 인천인의 고향인 셈이다.
개항 이후 매립되면서 고난이 어린 숙명의 길을 거쳤다.
1883년 개항 이전 오늘날 도원·송림·송현·금곡·창영·율목·화평·화수·북성·송월동과 함께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의 일부였다.
법정동으로서는 고잔리에 속했지만 별도 지명 만석동으로 불렸다.
만석이란 곡식 1만석을 뜻한다.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해운을 통해 서울 도성으로 옮기기 위한 거점 노릇을 하는 창고지대가 이곳에 있었다.
여기서 풍선을 이용해 강화해협의 염하와 한강을 거슬러 용산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이곳 조창(漕倉)지대는 큼지막한 창고 서너 개와 거기 매달려 사는 민가 20여 호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개항과 동시에 더 큰 의미로 떠오르게 된다.
개항 직후 인천 개항장 주변에는 서구열강이 공동으로 임차한 각국지계와, 청국지계, 일본지계가 설정됐다.
만석동 지역은 각국지계 북단에 들어갔다.
만석동은 창고가 있는 뭍과 창탄지대(漲灘地帶), 즉 밀물 때 바다가 되고 썰물 때 갯벌이 되는 해안이었다.
거기에는 고양이 부리처럼 생긴 괭이부리섬[猫島]이 있었다.
1896년 인천감리 이재정이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문서, 1901년 외부대신 박제순이 일본공사에게 보낸 문서, 1906년 인천부윤 서병규가 의정부찬정대신에 보낸 문서 등에 갯벌 매립추진을 알게 하는 기록들이 있다.
일본인 상인 이나다 카츠히코(稻田勝彦)와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등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1910년 전후 200.9m 축대를 쌓고 창탄을 매립했던 것이다.
괭이부리섬은 이때부터 육지로 바뀌어 만석동의 서북단으로 됐다.
만석동은 대부분 이나다의 소유였다.
기대한 대로 산업용지로 분양을 못해 고심하던 이나다는 마침 부도정(현 선화동) 유곽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 묘도 매립지에 핫케이엔(八景園)이라는 요정 겸 유곽을 열었다.
일부 인천 향토사 관련 글에 이 핫케이엔을 '근강팔경(近江八景)'과 연계해 설명한 것이 있는데, 필자 생각은 다르다.
그 근강팔경도 일본에서 본딴 것이고, 핫케이엔이 일본 온천장 곳곳에 있는 료칸(旅館) 이름이기 때문이다.
핫케이엔이 필자가 일본여행 중 들렀던 료칸과 같은 업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저널리스트 출신 홍성철 선생의 '유곽의 역사'(2007)는 핫케이엔이 유곽으로 총독부 허가를 받아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무튼 이나다의 묘도유곽은 다운타운에서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난봉꾼들이 오지 않아 실패했고, 그냥 버려져 있다가 뒷날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제가 대륙진출을 꿈꾸면서 공장지대로 탈바꿈했다.
1920~30년대 신문이나 인천상공회의소 통계연감을 보면 만석동 소재 공장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 노동력이 싼 인천에 공장을 짓고 본격적인 식민지 경제를 일으켜 중국 진출에 대비했다.
대표적인 것이 본사를 나고야(名古屋)에 둔 일본차량제작소, 도쿄에 본사를 둔 일본제분, 오사카(大阪)에 본사를 둔 이화(理化)금속과 동양방적(東洋紡績) 등이다.
태평양전쟁을 앞두고선 조선기계제작소가 세워져 잠수정을 만들었다.
뒷날 인천철도공작창, 대한제분, 현대제철, 동일레나운, 두산인프라코어 등으로 계승됐다.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공장이름이 있는데, 화재도 빈번히 일어나고 동양방적에서는 여공들의 '사보타지'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들 군수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숙소 지역은 오늘날 아카사키(赤琦)라는 동네명으로 남아 있다.
소장 향토사가 이희환 박사는 붉은 흙이 많았다는 것과 연계해 설명하는데, 일리가 있다.
한국 최초의 노동문제 소설인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가 동양방적과 이곳을 무대로 1930년대에, 그리고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이곳을 무대로 1980년대에 쓰였는데, 지금도 인천의 마지막 쪽방촌으로 남아 있다.
만석동은 1912년 만석정, 해도정(현 월미도), 화방정(현 북성동), 송판정(현 송월동)으로 분동됐다.
분동된 만석동은 오늘까지 지명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화수동과 경계를 이루는 무네미라는 구릉이 있었다.
매립 전 해수가 넘나들던 곳으로 수유리(水踰里)라고 불렀다.
작약도는 '물치'라는 우리말 지명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고쳤다.
2013년 11월 2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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