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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4/석남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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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6.20)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4
석곶 남쪽 석남동 '고잔·옻우물'하천·들판과 함께 이름도 사라져
▲ 석남동 거북시장 풍경.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서구
서구 석남동(石南洞)은 원적산(元積山) 기슭에 발달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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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에 번작리(番作里), 고잔(高棧), 옻우물, 박가뫼말(朴家墓村) 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871년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대표 취락인 번작리가 법정리로 기록돼 있다.
1911년 발간 <조선지자자료>에는 번작리에 소리(小里, 자근말)와 큰말(大里, 큰말)이, 고잔리에는 칠정리(漆井里,옷우물), 굴내리(屈內里, 굴안말)이라는 자연취락 이름이 실려 있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무라가미초(村上將町)였다.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 해전을 지휘한 함대사령관 무라가미(村上)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번작리는 번지기로도 불린다.
옛날에 포구였고 군대의 기지와 초소가 있어 근무당번을 정해 번을 섰던 터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오늘날 '거북시장'이라 이르는 저자와 그 아랫쪽 마을이 옛날의 번작리이다.
고잔은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지역을 이르므로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날 중구 일대, 남동구 고잔동, 그리고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었다.
석남동의 고잔이 특이하다면 유독 높을 고(高)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 곳 고잔은 1960년대만 해도 인가가 두세 채에 불과했다.
옻우물은 북쪽 마을이다. 발음되는 대로 '오두물'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 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와서 몸을 씻으면 잘 낫는다 해서 붙여졌다.
옛날에는 계곡에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흘렀다.
작은 규모의 간장공장이 있었고 노송들이 키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지금 석남초등학교가 들어선 곳부터 거북시장의 위쪽(북쪽) 끝, 그리고 신도로 옆의 지금 강남시장이라 부르는 곳까지가 옛날의 옻우물 마을이다.
지난날 병을 낫게 한 우물샘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도 석남약수터라 불리며 물통을 든 사람 왕래가 빈번하다.
박가뫼말은 동쪽 산밑에 있었으며 '바그메'라고도 불렀다.
이 곳에 박씨 묘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전하는데, 이 곳에서 평생을 산 주민들은 박씨보다는 배(裵)씨가 더 많았다고 말한다.
이 곳에서는 초콜릿 빛깔의 찰흙이 많이 나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 곳에는 약 40년 전부터 '마가의 다락방 기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검정다리마을은 큰길 옆에 있었다.
일제 때 주민들을 강제부역시켜 만든 국방도로에 검정색 콜타르를 칠한 목제 육교 2개가 1960년대 초까지 놓여 있었다.
저절로 이 육교 근방에 가옥들이 들어서고, 그 취락을 검정다리마을이라 불렀다.
독굴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옻우물 마을에서 원창동 쪽으로 나갈 때, 도당재산 밑의 골짜기를 바라보며 걷게 돼 있었다.
이 골짜기에서 독을 구웠다 해서 독골이라 했고, 여기 취락이 들어서자 독굴마을이라 불렀다.
오늘의 행정동명인 석남동은 옛 석곶면의 남쪽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번작리 포구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보다는 인근 밭에 줄 인분을 실은 '똥배'가 많이 와서 서 있었다.
원적산이 마을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은 북구(현 부평구) 산곡동(山谷洞)에 닿아 있다.
석남동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은 철마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곡동과 가정동에 닿아 있는 철마산의 한 지맥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잔산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고작천(高作川)은 이 곳이 고작리로 불리던 시절에 명명된 이름이다.
원적산에서 발원해 석남동의 중앙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었는데, 지금은 복개돼 있다.
지난날 석남동 아래쪽에는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둔전(屯田)들'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군대에 소속된 토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번지기라는 지명과 연계하면 옛날에 이 곳이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들판에는 윗방죽, 아랫방죽, 안방죽 등 세 개의 제방이 있었다.
석남동에는 위에서 설명한 독골, 박가의 묘가 있던 박가뫼골, 갯가에 있었다는 먼갯골, 이렇게 세 개의 골짜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하천, 들판과 함께 모두 도시화하면서 시가지로 변해 버렸다.
이원규 pik@itimes.co.kr
2014년 06월 2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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