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9/장수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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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5.16)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9
장자리·수현리 합친 장수마을
뜻 오해해 壯水 아닌 '長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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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 장수동(長壽洞)은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조동면(鳥洞面)에 속해 있었다.
1842년과 1897년에 관찬(官撰)한 <인천부읍지>에는 노상리(路上里)와 수월리(水越里)로 기록됐다.
수월리는 무네미라는 우리말 지명을 옮긴 것이 분명한데, 노상리는 조선 후기 한성으로 가는 큰길이 있어서 붙인 지명으로 짐작할 뿐 분명한 연원을 알기 어렵다.
1903년 인천부가 21개 동네 명칭을 확정할 때는 노상리, 수월리, 만의리(晩義里)로 기록됐다.
정황을 보아 만의리가 새로 생긴 취락 같지는 않고 만의골이라는 우리말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6년 인천부가 동네명을 개정할 때 노상리는 장자리(壯者里)로 바뀌고 만의리의 한자가 宜로, 수월리는 수현리(水峴里)로 바뀌어 실렸다.
1911년에 나온 <조선지지자료>는 수현(水峴, 무너미), 장자동(壯字洞), 만의동(晩宜洞)으로 기록했다.
1914년 3월1일 인천 일부와 부평을 합해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거기 소속시키고 장수리(長壽里)라고 연원을 알 수 없는 지명을 붙였다.
장자리와 수현리에서 한 글자씩 땄는데, 장자리의 壯을 長으로 오해하고, 수현리의 水를 목숨 수(壽)로 잘못 이해해 연원과 무관한 '장수마을'로 지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장수리는 그해 4월 1일 조동면과 남촌면을 합해 남동면이라 할 때 그 면소재지로 됐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하면서 일본식 정명으로 고쳐 장수정(長壽町)이라 했고,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다시 장수동으로 회복됐다.
정부가 1961년 관보로 발간한 표준지명은 장자골, 무넘이, 만의골을 경위도 표시와 함께 부락이름으로 올려놓았다.
무넘이 혹은 무네미말, 그리고 무네미고개는 고려시대에 굴포천 운하를 서해로 연결하려 할 때 부평의 원통이고개에 암반이 있어 굴착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물길을 돌리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는 구전설화와 함께 지명어원을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이 곳에 수량이 풍부한 장수천이 있어서 물 넘어 있는 마을이나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고, 산이 우리말로 '뫼'이고 그것이 '모'와 '무'로도 쓰인 것을 보면 '산너머 마을'이었을 수도 있으나 개연성이 보일 뿐이다.
지명은 대개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남겨지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장자골(壯者里, 壯字洞)은 장수사거리 동쪽 수원으로 가는 길 200m에 있는 장자골 사거리, 북쪽으로 가면 주공아파트와 유엔빌라를 지나 청소년수련관으로 향하는 길 일대이다.
장자골은 무슨 의미를 담고 지어진 지명일까.
1906년 노상리를 장자리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에 장자골이 여러 곳 있는데, 부자가 살던 마을 혹은 맏아들이 살던 마을을 의미한다.
장수동 장자골에는 부자 마을과 장사 관련 설화가 있다.
부자마을인 이곳에 도둑이 자주 들었는데 8명의 장사가 있어서 도둑을 잡아 느티나무에 묶어놓고 혼줄을 내거나 관가에 넘기는지라 안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사들이 있다는 뜻도 더해져 장자골로 됐다고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향토사가들은 해석했다.
그러나 작다는 뜻의 우리말 '잔'에 성(城)을 나타내던 사멸된 우리말 '자'에 마을을 나타내는 '골'이 합성해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김윤식 시인(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은 2004년 인천역사자료관 발간 설화집 <옛날 옛적에 인천은>에서 8장사 설화를 소개하며 그런 견해를 제시했다.
만의골은 인천대공원 동쪽 너머 장려한 모습을 한 은행나무가 선 곳 일대이다.
고려시대 이곳이 군사요충지이고 만호(萬戶) 직위를 가진 지휘관이 있어서 만호골이라 한 뒤 만의골로 바뀌었다는 설이 유력했는데, <남동구 20년사>에서 이곳 지명유래를 집필한 조선일보 최재용 기자는 길게 늘어진 마을 '느직골'을 한자로 훈차해 그렇게 쓴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인천대공원 경내에 있는 관모산 (冠帽山)은 머리에 쓰는 관에서 유래했다는 설, 여러 갈래고 갈라진 산이라는 설이 있다.
공원 북쪽의 거마산(距馬山)은 큰 말이 뛰는 형상을 나타낸 말이다.
크다는 '거'와 마을 '마'와 산을 뜻하는 '뫼'를 합성해 큰마을산의 뜻을 담았는데, 그걸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2014년 05월 0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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