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7/구월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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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4.18)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7
거북 닮아 구산·땅 질어 구리울
개연성 짙은 유래 많은 '구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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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동 시청 주변 옛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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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 구월동(九月洞)은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주안면(朱雁面)에 속해 있었다. 성말·구월말·못윗말·전재울 등 자연취락을 형성했다. 이 마을들은 1842년과 1897년에 관찬(官撰)한 <인천부읍지>(둘 다 2004년 인천역사자료관이 재발간)에 성리(城里)·구월리(九月里)·지상리(池上里)·전자리(前子里)로 기록됐다. 그 이전 기록인 1789년의 <호구총수>는 주안면의 방리(坊里)로 1리, 2리, 3리, 성리(城里)를 올려놓았는데, 3리와 성리가 오늘의 구월동이라고 보면 된다.
1903년 인천부가 관할 동네명을 확정할 때 성리·구월리·지상리·전자리를 그대로 썼고, 1906년 5명 지상리를 구월리에 편입시키고 전자리의 한자표기를 전재리(全才里)로 고쳤다. 1911년에 일제가 조사 발간한 <조선지지자료>는 전재동(全在洞 젼재울)·성리(城里 셩리)·구월리로 기록했다.
1914년 다시 동네명을 축소하면서 위의 3개 촌을 구월리 하나로 통합했고, 1940년 일본식 정회 규정을 만들면서 정지정(鄭志町)으로 했다. 그러다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 구월동이라는 본래 지명을 회복했다.
위에서 언급한 오래된 재래 촌락들의 지명유래는 이렇다. 성말(城里)은 남동대로 옆 남부소방서와 미추홀도서관 일대를 가리킨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는 성(城)이 있던 곳이라 붙은 지명, 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서 붙인 지명이라는 두 가지 설을 채록해 기록했다. 문학산에 성곽이 있었으므로 성의 앞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지었을 개연성도 지닌다.
구월말은 한남정맥의 한 뿌리인 소래산에서 뻗어온 활개가 여기까지 이르러 있었고,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아 거북 구(龜)를 넣어 구산(龜山)이라 했다. 반월처럼 보이기도 해 반월로 했다가 한 글자씩 따서 구월(龜月)로 했는데, 그게 쓰기 좋은 아홉 구(九)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이곳이 땅이 질어서 '구리울'이라고 부르다가 구월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모두 그럴 듯하지만 분명한 연원 기록은 없다. 이곳은 큰구월말(남동소방서 위쪽)과 작은구월말(소방서 아래쪽)로 취락이 나뉘어 형성됐다.
못윗말(池上里)은 남동소방서 남쪽에 연못이 있었고 그 위쪽에 있던 마을이다. 전재울은 남동경찰서 근방에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남동경찰서에서 남동공단 방향으로 가다 보면 '전재울삼거리'라는 지명간판이 나오는데, 제대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중기 남사당과 광대 등 재인(才人)들이 모여 사는 동네여서 전재울이라 했는데, 처음에 전자리(前子里)로 기록됐다가 전재리로 바뀐 것이다.
인천 지명 연구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최재용 선생은 2010년 발간 <남동구 20년사>에서 새로운 해석을 소개했다. 성(城)을 뜻하던 사멸된 우리말 고유어 '자'와 '잣'에 근원을 둔 설명으로, 문학산성 앞에 있는 마을이라 '전자(前子)'로 기록했다는 국어학자들의 견해이다. 그것이 재인들의 마을과 중의(重義)로 맞물리면서 전재로 바뀌었을 개연성이 있다.
전재울에는 줄타기의 명인이었던 김상봉(金上峯)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궁중 연희(演戱)에서 비범한 줄타기 기술을 보여, 헌종 임금이 직접 상쇠를 뜻하는 '상봉'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 후 전재울은 더 번창했고, 김상봉은 명인으로 돼 제자들을 키우며 재인을 많이 배출했다. 전재울로 가는 고즈넉한 산길이 겨우 남아 있고, 집 몇 채가 오순도순 살아 있다. 재인들이 줄을 매고 연습을 했다는 500년이 넘은 고목도 시간을 뛰어넘어 이 마을에 살아 있다.
일제에 의해 1940년부터 5년간 사용된 일본식 정명 정지정(鄭志町)의 일본식 발음은 데이지초다. 일본 왕이나 공신 이름을 차용해 쓴 게 아니라 조선인을 기념한 것이라 특이하다. 그 조선인 이름은 임오군란 당시 인천부사였던 정지용(鄭志鎔)인데, 임오군란으로 한성 일본공사관이 습격을 당해 10여 명이 죽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온 공사 하나부사 요시다타(花房義質)에게 쌀밥을 지어주고 출국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지용 인천부사는 하나부사 속임수에 빠져 그런 것이고, 결국 대원군의 소환을 받자 자결했다. 제 나라 정부의 훈령을 받고 다시 돌아온 하나부사는 조선 조정에 임오군란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인천 개항의 길을 열었다. 일본인들은 정지용을 추모하고 기념해 이름을 지명에다 끌어다 썼던 것이다.
2014년 04월 1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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