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6/간석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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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4.11)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6
간촌·석촌리서 한글자씩 따온 간석
역에 이름 뺏긴 주안산은 만월산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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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12월 23일 간석 5거리에 인천 최초의 지하차도가 준공됐다. 지하차도가 준공된 직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사진 왼쪽 위 절개된 원테기고개의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김식만(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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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 간석동(間石洞)은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주안면(朱雁面)에 속해 석촌리(石村里)와 간촌리(間村里)라는 큰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871년과 1899년 간행 <인천부읍지> 기록이 그러하다.
인천 역사의 중요한 자료인 이 읍지들은 2004년 인천역사자료관에서 재발간했다.
이보다 앞선 문헌인 <호구총수>(1789)에는 2리(二里)로 기록돼 있는데, 주안면 전체 방리를 1,2,3리로 적은 걸 보면 통치의 편리를 위한 행정리였던 것 같다.
그런데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네명을 정비하고 확정할 때 석촌리를 고쳐 석암리(石岩里)라 하고, 간촌리(間村里)는 그대로 두었다.
일제가 강제합병 직후에 조사작성한 <조선지지자료>(1911)는 리명(里名)으로 석암리(石巖里, 우리말 병기기록 석바위)를, 촌명으로 석촌(石村, 돌말)과 간촌(間村, 샛말)을 올려놓았다.
행정상으로 석촌리 또는 석암리였으니 돌말과 샛말이라는 자연취락을 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 일부를 떼어내 부천군을 만든 뒤 주안면과 다소면을 통합해 부천군에 소속시켰다.
다주면이라 명명할 때 거기 소속되고 석암리와 간촌리에서 한 글자씩 따서 간석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36년 부천군 다주면이 대부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간석리는 다시 인천의 일부로 됐다.
1940년에는 일본식 정명으로 목월정(木越町)으로 됐다.
일본어 발음은 기고시이마치다.
동명의 장군 이름을 딴 것이다.
기고시이 장군(1854-1932)은 1904년 러일전쟁 중에 조선 임시파견군 사령관으로 인천에 상륙해 경성으로 진출했다.
경성을 장악하고 러시아 공사를 구금함으로써 한반도 지배의 교두보를 놓고 북진해 만주로 진군했다.
그래서 뒷날 인천의 일본인들이 그를 기념해 지명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다시 간석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에는 간석동의 오랜 지명으로 돌말, 샛말, 쇠파니, 풀무골말, 벌터, 기와집말, 양지말, 강신재 서낭당고개, 쇠골, 큰골, 작은골, 석바위 등이 실려 있다.
이 마을 출신인 필자의 인천고 동기생인 김종렬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돌말은 약사사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 자리를 잡은 마을, 그러니까 상인천중학교 길 건너편이에요.
그리고 그 옆마을이 쇠파니와 쇠골이지요.
지금 주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에서 쇠를 파낸 흔적들을 어릴 적에 보았어요.
큰골은 약사사 뒤편 산너머 옛날 음성 나환자촌이 있던 곳으로, 거기 가면 큰 골짜기와 작은 골짜기가 있었어요.
수량이 많아 봄철이면 겨우내 묵은 빨래를 하려고 우마차에 싣고 가곤 했지요.
성황당고개는 강신재와 거의 같은 곳인데, 주원마을에서 돌말로 빠져나가던 고갯길에 있었어요.
양지말은 주원고개에서 지금의 주공아파트와 옛 희망백화점 쪽으로 가던 길목 우측이었고, 기와집말은 부자동네로서 줄여서 개짓말이라고 했는데 강산재 아래였어요."
경인국도를 타고 서울 쪽으로 가다 보면 가장 높은 지대인 언덕길에 석바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50년 전 길 오른쪽 수도사와 동인천중학교로 가는 길목에 집채 만한 바위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가장 저명한 간석동의 지형지물은 주안산이다.
18세기와 19세기 문헌들에 '안'자가 岸, 安, 雁 등 여러 한자로 기록됐다.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인천 향토사가들은 마치 붉은 기러기 같은 형상을 띤 지금의 약사사가 있는 주안산(朱雁山)에 근원을 두고 설명했다.
이 주안산은 오늘날 이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안면의 서쪽 갯벌을 개척해 염전을 만들고, 주안면에 있는 염전이라 해서 주안염전이라고 했다.
염전 가까이 기차역을 만들면서 주안역이라 했는데, 뒷날 그 역 주변을 주안동이라 명명했고 이곳이 인천의 중심 주택지로 되면서 주객이 전도됐다.
주안산은 한때 원통산(元通山), 선유산(仙遊山), 약사산(藥師山)이라 불리다가 만월산(滿月山)으로 바뀌었다.
원통산은 조선시대 굴포천를 뚫어 운하를 시도하다가 바위가 많아 굴착에 실패하자 원통하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그 고개를 원통이고개로 부르게 된 이유는 인천 토박이들이 잘 아는 바다.
만월산은 이 산에 스님들이 약사사를 세우면서 내세운 법어 '東方滿月世界 藥師琉璃光如來(동방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동쪽 나라 온 세상에 부처님의 은총이 달빛처럼 비춰 중생의 재앙을 없애고 질병을 고쳐준다)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2014년 04월 1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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