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전설의 인천 레슬러 김석영(인상34회)(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3.28)
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34
전설의 인천 레슬러 김석영
"일본인 이길 방법은 운동뿐"
조선학생 대표로 여러종목서 압도
광복후 런던올림픽서 6위 기록
체육관 운영 … 후진양성도 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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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에서 지난해 진행한 연구성과물을 출간해 지역 연구자들에게 보내주었다.
필자는 받아보지 못했지만 함께 <대중일보> 연구모임을 꾸리고 있는 이성진 선생의 소개로 <인천체육사연구>라는 책을 살펴보게 됐다.
관련 전공분야나 관심분야가 아니라서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다가,
식민지 시기 인천에 묻혀 있는 인물들을 연구하고 있는 이 선생의 소개로 한 인물을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 말을 타고 있는 김석영의 모습.
인천이 배출한 전설적인 레슬러 김석영(金石永)이다.
(이하 김윤복, 김석영 부자 생애에 대해선 조준호, <인천체육사연구> 참조)
김석영은 191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김윤복(金允福).
1870년 인천에서 출생한 김윤복은 청일전쟁 때 일본 육군사령부 통역관으로 참전해 일본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인천항경무서 총순으로 경찰에 입문한 이래 1922년 퇴직하기까지 경찰직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1923년 인천부 부협의회원에 당선된 이후 인천자선회 부회장, 인천부세진흥회사 부회장, 경기도 도회의원, 인천수산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식민지 인천 지역사회의 대표적 유지 겸 재력가로 활동하면서 문화와 체육 방면으로도 활동 폭을 넓혔다.
김윤복은 1927년 축항사 후신으로 쇠락해가던 조선인 극장인 애관을 사들여 신축·낙성해 재개관했고, 1936년에는 인천체육회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설립했고, 인천부회 부의장을 거쳐 1944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러나 8.15 이후에도 승승장구해 인천경찰서장으로 재직하다가, 1949년 3월 반민특위 인천지부에 자수해 물러난 후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 1952년 9월 사망했다.
김석영은 인천에서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자랑하는 부친 아래서 유복하게 성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933년 인천상업학교 34회로 입학한 후 만능스포츠맨으로 뛰어난 운동실력을 보였다.
조선인을 대표해 어떤 운동이든 일인 학생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남달리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일본인에게 이기는 길은 공부보다 운동이라고 주장"(<인고백년사>, 240쪽, 조준호 책에서 재인용)하면서 스포츠에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김석영은 조선체육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했던 '전조선수상경기대회'에 인천상업학교의 수영 대표로 처음 출전했고, 축구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김석영은 결국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해 1936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물론 그의 일본유학은 부친의 재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본 오사카 간사이중학교에 입학해 무사히 졸업한 김석영은 1938년 일본 명문사학인 메이지대학에 입학한 후 일본에 빠르게 보급되던 레슬링 매력에 빠졌다.
천부적인 신체와 노력 덕에 그는 레슬링부에 가입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선배들을 물리치고 일본 레슬링 웰터급 일인자로 성장했다.
그 해 10월에는 일본 아마추어레슬링협회 창립기념대회에서 미들급으로 출전해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전일본 레슬링 라이트급 선수권, 1940년 전일본레슬링대회 미들급까지 석권했다.
김석영이 언제 귀국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8.15 해방 이후 국내에서 레슬링 보급을 위해 서울에서 동분서주하면서 인천신사 건물을 접수하고 그곳에 레슬링 도장을 차렸다고 한다.
그는 '인천레슬링구락부'를 꾸려 20여 명의 문하생을 가르치면서 신생 독립국가인 한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나가려고 김석영은 1947년 7월부터 4차에 걸쳐 진행된 올림픽 대표선발전을 어렵게 통과했다.
그는 웰터급의 황병관, 패더급의 김극환, 밴텀급의 한상룡과 함께 라이트급의 대표선수로 1948년 7월 29일 개막한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세계 레슬링의 높은 벽에 막혀 결국 국내 선수 중에선 최고 성적인 라이트급 6위에 그쳤다.
하지만 그는 귀국 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최강팀인 황병관의 한국체육관과 함께 인천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인천 레슬링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니, 후진으로 장창선과 임배영 등을 키웠다고 한다.
김석영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부친의 굴곡진 삶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비운의 현대사인 한국전쟁 소용돌이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식민지시대 인천상업학교 시절 운동을 통해 일본인을 이기려 했던 그의 심성으로 비춰 해방 후에는 인천 좌파계열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최후를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으로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덕적도 인근에서 군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2014년 03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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