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9/용현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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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2.21)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9
비랑·독정리 합친 용정리
'용 나타날'용현동 바뀌어
인천·하와이 교민이 만든 인하대
'용현'지명영향 받아 명문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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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구 용현동(龍現洞)은 조선시대 후기 인천도호부 다소면에 속했으며, 비랑리(飛浪里)와 독정리(獨亭里)라는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주목할 것은 두 마을 한자 지명 기록의 변화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간행된 '호구총수'는 물결이 날린다는 뜻으로 飛浪里, 정자 하나가 우뚝 섰다는 뜻으로 獨亭里로 기록했다.
1871년 출간한 '인천부읍지'는 비랑은 그대로, 독정은 篤丁으로 바꿔 기록했고, 1899년 간행한 '인천부읍지'도 그것을 따랐다.
1903년 관청이 기록한 동네명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1906년 대한제국 시절 인천부가 동네명을 정리할 때 비룡동(飛龍洞)과 독정리(讀亭里)로 올리고, 1911년 일제가 토지측량 직전 조사한 내용을 적은 '인천지지자료'도 그것을 따라 비룡동(飛龍洞, 우리말은 비령이로 기록)과 독정리(讀亭里, 우리말은 독졍이로 기록)로 올려놓았다.
물결이 날린다는 뜻을 가졌던 지명이 1905년 이후 갑자기 '용이 날아오른다'는 뜻의 지명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1883년 개항 이전 이 지역은 민가가 드문드문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다소면에는 11개 동네가 있었고, 인구가 349가구 1072명이었으니 비랑리와 독정리는 기껏 1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수봉산에서 내려다 보면 초가집들이 점점이 있었을 것이다.
먼 눈으로 바다 쪽을 보면 파도 위에 까치노을(파도 위에 흰 거품이 솟는 현상)이 떠서 물결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을 터이다.
그게 지명기원으로 돼 비랑으로 출발한 것일까?
아니면 용이 승천한 전설이라도 있어 처음부터 비룡이었을까?
그 힌트를 얻기 위해 '조선지지자료'에 실린 봉우리·골짜기·들판·고개 이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비령이에는 비룡산(飛龍山, 비룡뒷산), 움메꼴, 동강골, 사현(蛇峴, 바얌이재), 대호현(大狐峴, 큰 여우고개), 소호현(小狐峴, 작은 여우고개), 도당현(禱堂峴, 도당재), 봉수평(棒水坪, 봉슈뜰) 등의 지명이 실려 있다.
독졍이에는 수봉산(繡鳳山, 무릿재), 독정곡(讀亭谷, 독졍꼴), 소기곡(小基谷, 자근터꼴), 협곡(狹谷, 조분꼴) 등의 지명이 나와 있다.
기록만 보아서는 비랑리 또는 비룡리의 지명연원이 까치노을인지, 용의 승천 설화인지 분명하지 않다.
비룡과 독정 마을은 인하대·인하사대부고·정석공고 등이 앉은 나즈막한 산기슭에, 그리고 이 산과 수봉산 사이 낮은 곳에 있었다.
앞에서 다룬 숭의동처럼 용현동도 고개와 골짜기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정은 전국에 있는 동명의 많은 이름이 독을 굽는 가마가 있어 명명된 것과 다르게 보인다.
줄곧 정자 정(亭)을 쓴데다가 읽을 독(讀)을 붙였기 때문이다.
필자 선친이 촌로들의 구술을 채록해 쓰신 '인천지명고'(1983)는 용이 날아올랐던 전설이 있어서 비룡리였고, 서당이 있던 곳이라 독정이라 했다고 한다.
용현동과 주변에서 출생·성장한 필자의 동창들 생각도 대강 비슷하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비룡은 1905년 이후 쓰기 시작한 지명인데, 용의 승천 설화가 생기고 점차 민중의 동의를 얻으며 굳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독정은 서당골이어서 붙인 지명으로 보면 된다.
1914년 인천과 부평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만들 때 비룡리와 독정리는 한 글자씩 따서 용정리(龍亭里)오 됐고, 1937년 일지출정(日之出町 히노데마치)라는 왜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일본 국기 히노마루를 함축한 고약한 지명이며, 일본에 같은 지명·회사 이름이 많이 있다.
1946년 1월 오늘처럼 용현리로 바꿨는데, 나타날 현(現)을 썼다.
큰 인물이 배출될 기막히게 좋은 지명이다.
인하대는 인천시가 땅을 내놓고 인천항에서 사탕수수 노동이민을 떠났던 하와이 교민들이 출연해 만든 대학이다.
재벌 소유 대학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숭고한 인천의 대학이다.
비랑리를 비룡리로 바꾼 것이 좋았는지, 용현이라는 지명 작명이 좋았는지 명문대학으로 발전해 큰 인물들을 배출했다.
장차 대통령이나 노벨상 수상자 같은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면 '용이 나타난다'는 지명과 안성맞춤이다.
독정은 인하대 뒤쪽 독쟁이고개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비랑 혹은 비룡은 정확히 어디일까.
1961년 정부는 국무원고시 16호로 전국표준지명을 공시했다.
비룡은 용현1동 동경 126.39 북위 37.26로 인하대 교지 안이다.
그 자료에는 용현2동의 약물터와 낙섬도 저명한 지형으로 올려놓았다.
낙섬은 조수가 빠르게 드나들던 갯벌이다.
토지공사가 그곳을 매립해 용현5동을 '토지금고'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2014년 02월 2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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