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26/관교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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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1.24)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26
인천서 가장 오래된 마을
관청·향교리 합쳐 관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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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교동에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 단지 뒤로 문학경기장과 문학산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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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관교동(官校洞)은 앞에서 이야기한 문학동과 함께 비류백제 도읍지로서 인천에서 가장 오랜 마을이라 이를 수 있다.
개항 때까지 1000년 이상 인천의 행정중심지였으므로 인천 관련 지지(地誌)에 많은 자료가 들어 있다.
이들 대부분이 인천역사자료관이 2004년 발간한 '역주 인천부읍지'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중기 관교동은 인천부 부내면 동촌(東村)과 승기리(承基里)였다.
1789년 세수와 군역 조사를 위해 만든 '호구총수'도 동촌리와 승기리를 부내면의 동네명으로 올려놓았다.
1883년 개항으로 해안동·관동·중앙동 등 '워터프론트' 지역이 새로운 인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새로운 행정청인 인천감리서도 거기 세워졌다.
천년 이상 인천의 중심이었던 관교동은 대한제국 말기 부내면이라는 이름을 그쪽에 넘겨주고 구읍면이라는 행정지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원인천'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일제가 1911년 발간한 '조선지지자료'는 오늘의 관교동 지역 동네명을 구읍면 향교리·관청리·승기리로 기록했다.
향교가 있는 마을, 인천부 관아가 있는 마을, 그리고 동쪽으로 떨어져서 승기리라는 촌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기는 무슨 뜻인가.
'조선지지자료'는 많은 한자지명에 우리말 지명을 병기하고 있으나 승기는 한자명만 기록했다.
한자로 터전을 이어온 곳이라는 뜻이니, 1000년 유래를 가진 마을로 보면 될 듯하다.
1914년 4월 일제는 인천 일부와 부평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신설했다.
이곳 구읍면과 지난날 원우이면(遠又爾面)이었던 서면(西面)과 학익동(옛 지명 함박리)을 병합해 문학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기 포함된 향교리와 관청리를 관청리로 명명하고, 동쪽으로 뚝 떨어진 승기리 지역은 주안정(朱安町)에 얹어버렸다.
그러다 1937년 인천부의 권역을 확장하면서 다시 인천부에 포함시켰고, 1940년 4월1일 일본식 지명인 원정(元町)으로 바꾸었다.
원정의 일본어 발음은 모토마치, 일본에는 고베(神戶), 요코하마(橫浜), 그리고 홋가이도(北海道)에 같은 지명이 있다.
한국에는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에 그런 지명을 붙였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관교동으로 정했다.
지난날 관청리와 향교리였고 인천부 관아와 향교 건물이 살아 있어서 그렇게 붙였다.
1967년에는 문학동에 편입시켰다가 1996년 다시 분동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길가 문학산 기슭에 있는 인천도호부청사와 향교는 제 자리가 아니라 재현한 건축물이다.
인천부 관아는 문학동 262번지 문학초등학교 내에 남아 있다.
객사 20칸, 삼문 3칸, 동헌 15칸, 내동헌 33칸 외 여러 채의 부속건물로 돼 있었다.
조선 후기의 '인천부읍지'들은 몇 가지 저명한 지명지물을 기록했다.
제언(堤堰, 저수지 둑)으로 연지(蓮池), 촌하(村下), 도찬(道贊)이 있다고 실려 있다.
문학동에서 평생을 살아온 필자의 인천고 동창인 이기요 형은 문학초등학교 아래 인공섬이 만들어진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게 '연지'일 것으로 추정한다.
'촌하'는 알지 못한다.
'도찬'은 문학동에서 문학터널 아래를 거쳐 학익동으로 넘어가던 산길인데, 거기 저수지 둑이 있었다고 들은 바 없다고 말한다.
읍지들은 학산서원(鶴山書院)이 부(府) 서쪽 2리에 있다고 했다.
행정구역상 문학동에 포함되나 지난번 문학동편에서 다루지 못해 여기서 설명해 본다.
인천향교에서 공부하던 유림들은 인천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이단상(李端相)을 기념하는 서원을 만들어달라고 상소해 1708년 서원을 만들고 '학산'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160년 동안 인천의 학문 중심이었으나 1871년 철폐됐다.
1949년 학술조사에서 학산서원이라고 새긴 기와가 발견됐으나 제대로 보존을 못해 당시 문학산 기슭에 세운 표지석이 남아 있다.
도찬현(道贊峴, 우리말 지명 도쳔이고개), 마근현(馬根峴, 우리말 지명 마근다미고개)가 '조선지지자료'에 실려 있다.
도찬현은 이기요 형 말대로 문학터널 아래를 거쳐 학익동으로 넘어가던 산길이다.
마근현은 관교동에서 주안 신기촌 마을로 넘어가는 길, 그러니까 문학초등학교에서 승학산을 넘어서 신동아아파트를 스칠 듯하다가 쌍용아파트로 쪽으로 가는 고개이다.
문학산 근방 산길을 타본 사람들은 알 만한 곳이다.
2014년 01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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