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한상억(33회) 그리운 금강산 노래 남기고(퍼온글)
본문
퍼온곳 : 경인일보(14. 8.14)
[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9]한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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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 남기고
인천 사랑 그리움 남기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 7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사진 오른쪽으로 해금강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2004년 개통한 지 4년 만에 폐쇄된 금강산 육로관광 도로가 나 있다. /김민재기자
강화 태생… 해방이후 김차영과 함께 동인회 만들어 활동
문인협 인천지부위원장 등 맡아 지역 문화계 이끌어
연작시 6편 '인천찬가' 등 애향심 가득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
1987년 美 LA로 떠난 뒤 생애마감 한달전 돌아와 문인들 만나
"모두 버리고 가는 것 같아 가슴아파" 이민직전 인터뷰 직접 스크랩
인천의 대표 향토시인 한상억(韓相億·1915~1992)은 인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친 시인이었다.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는 천생 '인천시인'이다.
1915년 9월 1일 강화 양도면에서 태어난 한상억은 1930년 길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립상업고에 진학했다.
해방이후 동향 시인 김차영과 함께 '시와 산문' 동인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195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위원장을 시작으로 문총 인천지부 위원장(1961), 한국예총 경기지부장(1963) 등 인천 문화계에서 주된 역할을 맡았다.
▲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 표지.
한상억이 생전에 발표한 시집 2권 '平行線의 對決(평행선의 대결·1961)'과 '窓邊思惟(창변사유·1976)', 그리고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1993)'엔 그의 인천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특히 '仁川讚歌(인천찬가)'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시 6편이야말로 그를 왜 인천시인이라 부르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천찬가'는 첫 번째 '파도의 노래'에서 시작해 '싸리재의 노래' '월미도의 노래' '송도의 노래' '신포동의 노래' '문학산의 노래'로 이어진다.
싸리, 싸리재/구름 무심히 넘던/싸리재 고개/수건 쓰고 고개 숙인/방앗간 아가씨/한숨이 넘던 고개//솔가래 한동 팔아/동태 한마리/지게다리에 매달고//취해 넘던 긴담 모퉁이/싸리꽃 하늘거리던 언덕을/高層建物(고층건물)이 내려 누르고/세상은 많이도 변했는데/黃海(황해)의 鄕愁(향수)만은/潮水(조수)처럼 밀려 넘는 고개…(이하 생략)
한상억이 제2시집 '창변사유'에 남긴 '인천찬가 2편'인 '싸리재의 노래'. 과거 1960~70년대 인천 중심가 중 하나였던 싸리재는 애관극장, 신신예식장, 인천기독병원을 중심으로 양복점과 가구점, 약국 등이 줄지어 있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한상억이 고향 강화를 떠나 1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싸리재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신포동과 배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다니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는 싸리재를 시에 담았다.
▲ 강화 양도면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지난 8일 오후 한상억이 살았던 율목동 231번지를 찾았다. 지금 옛 집은 사라졌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인천기독병원과 인천성산교회 사이다. 싸리재는 한상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상억이 장로 안수를 받았다는 성산교회에서 최상용 담임목사를 만났다.
최 목사는 1980년대 부목사로 있을 때 교역자와 성도 관계로 한상억을 만났다고 한다. 최 목사는 한상억을 시인이면서 '신앙인'으로, 또 '인천 역사가'로 기억했다.
최 목사는 "인천역사에 대해선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한 분이었다"며 "노인대학 어르신들을 모시고 강화의 역사 유적지로 갈 때면 늘 동행해 설명하셨다. 아마 지금의 역사해설가보다 더 뛰어나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미국 이민 당시 한상억과 부인 이호숙씨. /한충희씨 제공
목양실을 나와 싸리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산교회 주차건물 옥상에서 인천을 감상했다. 월미도 너머로 인천항 부두 크레인과 인천대교가 어렴풋이 보였다. 한상억도 아마 여기 어딘가에서 월미도와 서해바다를 보면서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천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으리라.
해가 솟는 아침/별이 뜨는 밤/노래 소리/물결 소리/끊이지 않는/너는 오랜 歲月(세월) 지금도/港口(항구)의 感覺(감각)/그리고 鄕愁(향수)…(중략)…/너의 발자취/하나, 둘,/차라리 뼈저린 歷史(역사)/누가 여기를 다녀 갔기에/누가 여기서 말씀했기에/누가 여기서 노래했기에/지금은 사라진/潮湯(조탕), 龍宮閣(용궁각)의 幻影(환영)…(생략)
'월미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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