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9/연희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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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7.25)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9
여인들이 비단 짜던 여희마을…조선후기 수군 요충지 연희동
▲ 서구 연희동 계명공원 안에 있는 연희진지 표지석은 연희진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연희진지는 1879(고종16)년 설치됐다가 개항 전인 1882(고종19)년 없어졌다. /인천일보 자료실
서구 연희동(連喜洞)은 필자의 선조들이 300여 년 살아온 고향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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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곶의 중심로서 연일과 샛말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반도처럼 뻗쳐나간 곳이 있는데 그 곳을 '용의머리'라고 부른다.
거기에도 작은 취락이 있었다.
1789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한자 표기가 지금과 달리 연희리(延希里)라고 기록했고 1911년 간행 <조선지지자료>는 연희리(連希里)로 기록했다.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연희(連喜)로 한자표기가 바뀌었는데 의미가 중요하지는 않다.
'연일'이라는 본마을의 음차기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는 '연일이 신라시대부터 여자들이 모여 비단을 짰던 곳이라고 전한다.
근방 여인들을 모아 직조 기술을 가르치던 교습소 구실을 했다고도 전한다.
그래서 본래 여희(女姬)라는 지명을 가졌었는데, 그것이 연일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형상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여인과 같아서 여희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다'고 기록했다.
두 가지 전설이 모두 여인과 직조에 연결하여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연희동에 정작 비단과 베 직조의 근원이 되는 뽕나무밭이나 삼밭은 남아 있지 않고 원로들도 그런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샛말은 연희동과 공촌동의 사이에 끼여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1991년부터 시작된 도시개발로 인해 큰 도로가 관통해 나가고 자연취락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연희동 본말에서 샛말과 공촌동으로 가는 고개를 새꼬랄고개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개 밑에 있는 작은 취락을 새꼬랄말이라고 불렀다.
고개의 모습이 새의 꼬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
지금 연세병원이 있는 곳이다.
용의머리는 연희동 본말에서 뻗어간 땅의 모습이 용과 같고 바다에 이른, 마치 용의 머리 같은 곳에 취락이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옛날 연희동이 시작되던 곳은 현재의 연희감리교회가 들어선 작은 고개였다.
심곡동에서 뻗어온 서곶로 길은 이 고개에서 오른편으로 휘어지며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갈마산과 연희동 본마을 사이를 지나 다시 활처럼 휘어지며 고개를 올라갔다.
연희교회 근방 고개를 군인길 또는 군잇길이라고 불렀다.
이 곳은 삼거리였다.
서곶로를 타고 와서 휘어지지 않고 서곶초등학교와 옛 연희진 터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아마도 서곶로가 닦여지기 전에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을 타고 가면 서곶초등학교와 서곶면사무소(옛 연희진 자리)와 서곶지서(서곶면사무소의 건너편)에 곧바로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군인길 언덕에서 갈 수 있는 또하나의 길은 용의머리 반도로 가는 것(줄안마루길이라고 불렀다)이다.
옛날에 군인길은 중요한 교통로이자 군사도로였다.
고려 때는 이 길을 타고 북으로 가서 개경으로 통하고, 조선시대에는 이 길을 타고 와서 연희진에서 동쪽길을 잡아 계양산 옆 경명현을 거쳐 부평부(富平府)나 서울로 갔다.
그리고 1883년 조선 조정은 연희진을 설치하고 용의머리 반도 끝에 용두돈대를 만들고 아울러 이 곳에 기연해방영(京畿沿海防營)이라는 병영을 설치했다.
군인길이란 지명은 아마 그런 연고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급기관에서 연희진이나 용두포대로 긴급 전령이나 파발이 달려오고 달려가고 군병력도 대오를 맞춰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의 군사도로 군인길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있어 옛일을 더듬을 수 있게 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가옥들 사이로 난 하나의 골목길처럼 되어 버렸다.
연희동에는 수군기지인 연희진(連喜鎭)과 해안 포대가 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뒤에 서해로 침범해 오는 서구 열강의 함선을 격파하기 위해 1878년에 만든 것으로서 연희진은 연희동 247번지에 있었다.
포대는 용두산에 있어서 용두포대라고 불렀는데 군사적 요충지여서 앞바다가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국군의 해안 경비초소로 사용되었다.
서곶면사무소가 1914년에 연희진터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인천부 서곶출장소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명칭이 바뀌어 인천부 서곶지청이 되었다.
이것은 1948면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출장소로 바뀌었다.
출장소가 현재의 서구보건소 자리로 이전한 뒤 한동안 건물이 보존됐으나 1990년대의 도시개발로 없어졌다.
이원규 webmaster@incheonilbo.com
2014년 07월 2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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