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7/가정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4. 7.11)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7
조선 개국공신 정자 이름 딴 가정동천마산은 '철마산'으로 잘못 알려져
▲ 가정동 산 54 일대 축곶산 정상(해발 79.8m)에 위치한 축곶봉수는 문학산과 강화도를 지나 서울 남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인천일보 자료실
철마산(鐵馬山) 옆을 넘어가는 승학현 남쪽에 위치한 가정동(佳亭洞), 서구의 남단인 가좌동에서 여기까지가 남서곶, 옛날의 부평부 석곶면이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가정동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철마산과 축곶산이다.
철마산은 <대동여지도>를 포함한 조선시대의 모든 기록에 천마산(天馬山)으로 기록돼 있다.
산중턱에 하늘을 향해 내달리다가 도약하는 말발자국 형상이 있어 마제봉(馬蹄峯)으로도 불리는데다, 이 산 골짜기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고 천마가 날았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이름이 바뀐 것은 측량기사의 무심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1913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반도 전체 토지를 정밀측량하였고, 그 때 서곶 지역을 측량한 기사가 주민들에게서 '철마산'이라고 잘못 듣고 지도에 기록해버렸다.
더구나 그 지도는 오늘의 부평구 산곡동과 청천동, 서구의 가좌동과 석남동에 걸쳐 있는 원적산과, 부평구 일신동과 남동구 만수동에 걸쳐 있는 금마산도 철마산으로 표기함으로써 인천에는 3개의 철마산이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 부작용으로 인한 후유증도 있었다.
가좌동에서 산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들고는 지도상에 있는 그대로 '철마산관통도로'라고 불렀다.
축곶산은 해발 표고가 160m에 달하는 천마산의 연봉이다.
존재감이 없던 산이었지만 인근에 청라신도시가 들어서고 인천시가 이곳을 공원화하며 봉수(烽燧)를 복원하려고 함으로써 새삼 주목받고 있다.
축곶은 가정동 봉화재 마을 앞에 있으며 싸리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가정동과 심곡동에 사는 원로들은 '싸리뫼'라는 우리말 지명도 사용한다.
계양산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와 철마산을 만들고 더 나아가 승학현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이 산까지 나아가 뚝 끊어진다.
한자 표기에 곶(串)자가 사용된 것을 보면 이 곳 또한 바다까지 돌출했던 것 같다.
이 산 앞에 펼쳐진 들판을 '봉화재들'이라 부르는데, 형태로 보아 방죽을 막아 만든 간석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뭉툭 끊어지듯이 솟은 이 산이 육지의 끝이었다는 것이다.
이 산에 봉수가 있었다.
봉수란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방법이었다.
밤에는 횃불이 잘 보이지만 낮에는 안보이므로 연기로써 신호하였다.
<세종대왕실록> 제148권은 '경기 부평도호부의 축곶산 봉수는 부평 서쪽 10~15리에 있는 봉수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인천 성산(成山. 문학산. 필자주) 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김포 백석산 봉수로 전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산의 봉수는 세종 5년(1423)에 세워졌다.
조선 말기까지는 별로 빈번하지 않게 사용되다가,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가정동은 지난날 가정마을과 산밑마을, 그리고 봉화촌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871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는 봉현리(烽峴里), 가정리(佳亭里), 두 개의 법정리를 기록했다.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는 가정리(佳丁里) 하나만 기록했다.
봉현리는 지금 봉화촌, 봉화재라고 부르는 곳이고 가정리는 본마을이다.
뒷날 부평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세 곳을 합해 가정리(佳丁里)로 명명하였다.
<조선지지자료>기록을 그대로 쓴 것인데 한동안 그냥 통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지요다초(千代田町)였다.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의 해전에 참가한 일본 군함 지요다마루(千代田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가정은 이곳의 본마을이다.
조선조의 개국공신 조반이 말년에 여기 와서 가정(佳亭)이라는 정자를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 마을은 가정촌으로 불리웠으며, '가경주' 또는 '개경주'라는 변형된 지명도 사용되었다.
지금 루원시티 도시재생사업으로 형질이 바뀌어가고 있다.
승학현 밑에서부터 지금의 경인고속도로 서인천 인터체인지까지 자리잡은 마을을 산밑마을은 산밑주막이라고도 불렀다.
승학현을 넘어가는 고개 입구(현재의 한국전력 건물과 주유소 시설 뒤편)에 주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가정동에서 효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나지고개(안하지고개)라 한다.
조선 태조가 새도읍지를 찾으려 할 때, 이 고개 너머 피네미골짜기가 아흔아홉번째 골짜기가 되어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이원규 webmaster@incheonilbo.com
2014년 07월 11일 금요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