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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6/원창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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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7. 7)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6
대여곡식 보관하던 환자곶말 '원래 창고 있던 곳' 원창동 돼
▲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세어도. 정서진과 함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서구
서구 원창동(元倉洞)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배편으로 올라온 세곡을 하역하고 보관하던 포구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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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으로 갯말과 환자곶(還子串)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871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는 포촌리(浦村里)라는 법정리 하나만 실었다.
일제가 강제합병 직후인 1911년 조사 간행한 <조선지지자료>에는 포리(浦里, 우리말 표기 갯말)와 한적동(閑寂洞, 우리말 표기 한자고개)이 실려 있다.
1914년 3월1일 부천군이 신설될 때, 부평부 모월곶면과 석곶면이 서곶면 하나로 묶여지고 포리는 서곶면에 속하게 되었고 앞바다 섬인 율도와 세어도를 포함하게 되었다.
1940년 4월1일, 서곶면 전체가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포리도 인천의 일부가 되었다.
일제는 편입 즉시 동리의 이름을 일본식인 정명(町名)으로 바꾸었는데, 포리는 히사미즈초(久水町)였다.
8·15 광복 후, 정부는 일본식 지명을 없애는 일에 나섰고, 1946년 1월 1일, 원래 창고가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원창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리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있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인근 마을인 신현, 석남, 가정동이 법정동으로 통합하고 분리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다가 1998년 11월1일 신현원창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리의 본래 이름은 갯말이고 이곳이 원창동의 본마을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 선착장이 있어 배가 머물 수 있는 부두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이다.
이 갯말은 간뎃말, 아랫말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갯말은 바닷가에서부터 산의 구릉 위로 길게 자리잡았었는데 구릉 위에 있던 취락이 윗말이었다.
아랫말은 윗말 바로 밑에 위치했다.
1884년 이 곳에 전조창(轉漕倉)을 세우기 전에는 작은 섬이었는데 그 때 갯벌이 메워져서 뭍이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도촌(島村)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당시 이 도촌에 조수가 드나들어 허옇게 노염(露鹽)이 서려 있어서 노염밭이 되었던 터라 노염말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이 마을의 원로들이 늠말이라고 하는 것도 노염말의 음운변화인 듯하다.
간뎃말은 윗말과 아랫말의 중간지대를 가리켰다.
환자곶말은 조정의 대여양곡 보관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환자(還子)란 가난한 백성들이 춘궁기에 관으로부터 곡식을 빌어간 뒤 추수가 되면 갚는 차용제도를 말한다.
이곳 창고에 있던 곡식들이 환자여서 혼자 창고가 있는 곶(串)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의 '한적동(閑寂洞), 한자고개' 기록이 흥미롭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펴면서 전국을 삼각측량으로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책은 그 직전에 재래지명을 조사해 기록한 것으로 상당히 정확하다.
그런데 포리에서는 유래를 살피지 않고 불성실하게 기록한 것이다.
아마 조사책임자는 '한자고지'라는 말을 주민에게서 듣고는 그때는 환자창고가 사라져 없고 그냥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이라 그렇게 적은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당시 환자를 저장했던 환자 창고터가 해변에 있었고 전조창 터가 포리 해안에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지명은 치밀한 답사와 지명에 얽힌 스토리텔링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으면 그런 오류가 일어난다.
오늘날의 도로명 중심지명들에 참으로 우스운 오류가 보이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히사미즈초는 러일전쟁 때 인천 해전에 참가한 장군 히사미즈(久水)의 성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율도는 우리말로 밤염이라고 불렀다.
뭍에서 보면 밤톨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98년에 화약고가 만들어졌으나 곧 폐지되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썰물을 따라 갯벌을 걸어나가 섬에 가고, 밀물에 앞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갯벌은 매립으로 지금 육지가 되었다.
세어도는 우리말로 세루섬이라 하였다.
뭍에서 보면 가늘게 늘어져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 그렇게 지어졌다.
세어도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세어산이라 불렀다.
포리 포구 뒤의 옛날 도당굿을 하던 산을 도당산이라 하였다.
환자곶 마을 뒷산을 환자곶산이라 하였다.
율도에 있는 구릉을 밤산이라고 불렀다.
이 산에는 품질 좋은 향나무가 자생하였다.
2014년 07월 0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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