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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3/가좌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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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6.1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3
가재 많아 '가재울' 음차한 '가좌동'
▲ 보도진 윗나루 자리에 준공된 인천교(1958년 추정). /사진제공=김식만(치과의사)
서구 가좌동(佳佐洞)은 지난날 부평부 석곶면(石串面) 소속으로 가재울·건지골·감중절리(甘中節里), 그리고 능안말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썰물 때마다 길이 열리는 앞바다에 소염도(素鹽島)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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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을 보자. 1871년(정조 13) 면단위 호구, 인구수와 법정리를 기록한 '호구총수'에는 지금과 다른 한자로 표기돼 가좌동(加佐洞)으로 실려 있다. 1911년 일제가 합방 직후 조사작성한『조선지지자료』에는 한자가 '佳佐洞으로 실리고 자연취락명으로 상촌(上村, 웃말), 하촌(下村, 아랫말), 행화리(杏花里, 살곶지), 감동사리(甘同寺里), 능내리(陵內里 능안말) 등이 올라 있다.
아름다울 '가(佳)' 자인가, 더할 '가(加)'인가, 가좌리였나 가재리였나 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말 지명 '가재울'의 음차기록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오늘처럼 佳佐里로 고정됐고, 1940년 일제에 의해 천간정(淺間町, 아사마초)으로 바뀌었으나 1946년 다시 가좌동으로 회복됐다.
가재리는 옛날 '가재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맑은 시내(佳佐川)가 있어 가재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시내 아래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시내의 물이 흘러들지 않아 마른 연못이 돼서 건지(乾池)라고 불렀다. 이 건지에서도 큰 가재 한 마리가 나왔다고 한다. 가재올은 크게 보면 가좌동 전체를 말하며, 좁은 의미로 보면 건지골 마을을 지칭한다.
건지골은 가좌동 전체를 놓고 볼 때 북쪽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 왔다. 윗말은 박씨가 많이 살아 '박촌말'이라고도 했는데, 가좌동 본마을의 위쪽이다. 지금 주공아파트 1단지 지역이다. 아랫말은 가좌동의 본마을이다. 윗말의 남쪽 아래 있으며, 현재 주공아파트 2단지가 자리잡고 있다.
▲ 현재는 인천교 주변이 매립되어 일반도로가 되었다(2010년). /사진제공=김식만(치과의사)
감중절리는 이 곳에 감중사(甘中寺)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조선지지자료』의 감동사리는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 절은 빈대가 많아 승려와 신도들이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다고 전해진다. 취락이 큰 편이어서 큰감중절과 작은감중절로 나누어 불렀다. 큰감중절은 아랫감중절로도 불리며, 지금 가좌1동 사무소가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작은감중절은 윗감중절로도 불렸는데, 현재 가좌3동 사무소 근방이다.
아사마초는 구한말에 한반도를 침탈할 때 자주 이용된 군함 아사마마루(淺間丸)를 기념해 그렇게 지었다.
『조선지지자료』 실린 행화리(杏花里 살곶지)는 보도진(步道津) 나루터이다. 동구 송림동과의 사이 300m의 해협에 놓인 나루로서 흔히 '보두지'라고 불렀는데, 한자 뜻 그대로 썰물 때는 배를 타지 않고 징검다리로 건너도 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인천교 아래쪽 1㎞ 부근이 이 나루터 자리였다.
윗나루와 아랫나루 두 곳이 있었다. 윗나루를 수도나루, 아랫나루를 그냥 보두지라고 불렀다. 수도나루란 인천의 수도관이 매설돼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윗나루의 경우 징검다리 통행이 가능해 배삯이 쌌고, 하류의 아랫나루는 거의 물에 잠겨 있어서 걸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 나루는 처음에는 개인이 경영하다가 인천부에서 관장했고, 부천군 서곶면에서 관장하기도 했다. 1961년 윗나루 자리에 인천교가 준공되면서 없어졌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해망재(海望峴, 해망째), 장현(場峴, 장고개)가 올라 있다. 해망재는 멀리 서해와 팔미도까지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릉에 감중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장고개는 가좌동에서 산곡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 앞의 마을을 장끝마을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건지골 드넓은 들판을 건지들이라고 불렀으며, 가좌천이 그 곳을 가르며 흘렀다. 옛날에는 그냥 '큰내'라고 불렀으나 1910년대에 일본이 토지측량을 한 뒤에 지금처럼 가좌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복개돼 있으며, 물은 가좌하수종말처리장까지 흘러간다. 이 가좌천이 끝나는 곳은 옛날에 갯벌이었고, 이 곳을 매립해 현재 제재단지가 앉아 있다.
건지골은 하천과 마른 연못이 있어서인지 습기가 많았다. 이 마을에 결핵환자가 많았는데, 사람들은 그 이유가 습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지금 진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원규 1004@itimes.co.kr
2014년 06월 1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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