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1/서창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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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5.2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1
옛 설래·독곡리 합쳐진 서창동 '인천의 마지막 오지' 날로 발전
남동구 서창동(西昌洞)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조동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조동면 동네 이름이 1, 2, 3(里)로 기록됐는데 대략 2리가 이곳이었던 걸로 보인다. 1842년 관찬(官撰)한 <인천부읍지>는 설래리(雪來里) 하나로, 1899년 <인천부읍지>는 곡촌(谷村)을 하나 더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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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네명을 정리할 때 설래리와 독곡리(獨谷里)로 했고, 1906년에는 설래리와 2리(二里)로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1911년 일제가 강제합병 직후 조사·발간한 <조선지지자료>는 곡촌(谷村, 우리말 표기 골말) 설내(雪乃)로 기록했다.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을 합해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남촌면과 조동면을 합해 남동면이라 고칠 때 거기 속하고 서창리(西昌里)를 대표지명으로 기록했다. 1940년 4월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식 정명 낭속정(浪速町)으로 바꾸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오늘처럼 서창동으로 회복했다.
본마을인 설래는 무슨 뜻이었을까. 본래 선래(船來)였는데 자음동화 현상으로 '설래'라 발음했고 그걸 그대로 雪來 또는 雪乃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갑자기 서창이라는 지명을 붙인 것과도 연관된다. 이곳이 해안이라 포구가 있고 배가 드나들었으며 남쪽 지방에서 거둔 조정의 환곡을 싣고 와서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창(西倉)이라 했고, 뒷날 그런 유래를 알지 못하고 서창(西昌)이라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93년 <인천시사>의 지명유래편을 집필한 인천교대 조찬석 교수는 서쪽 환곡창고 기록이 없음을 주목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배 한 척을 만들었으며, 서해에서 창성한다는 뜻으로 서창호(西昌號)라 명명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1980년대에 마을 원로들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1993)에는 서창동의 오래된 취락으로 설래촌 외에 독골, 골말, 궐재말, 장아골말 등이 실려 있다. 독골은 독을 굽던 골짜기여서 붙인 지명이고, 골말은 곡촌이라고도 했는데 깊은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크게는 서창동 전체를 일컫는 지명이기도 했다. 장아골말은 장곡이라고도 했는데 장아산 동쪽 골짜기에 있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궐재말은 유명한 선비의 재실(齋室)이 있어서, 장아촌말은 장아산 남쪽 기슭에 있어서 붙인 지명이다. 고려시대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은둔했는데 자신을 숨겨준 마을이라 해서 장아골 또는 장자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아산에는 그 설화와 연관된 망경대 표시석이 있다.
이곳에서 출생해 평생을 살아온 한복섭(68) 선생은 "서창동이 인천의 오지여서 개발이 늦어 자연취락들의 이름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말한다. 설래는 지금 주민센터와 서창초등학교, 태평1차아파트와 LG아파트가 있는 본마을이다. 궐재는 설래의 북동쪽, 설래에서 이곳을 거쳐 운연동으로 갈 수 있었다. 골말은 태평2차아파트가 앉은 곳, 여기서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독곡 마을이었다. 장아산은 서창동의 남동쪽 지역으로 제2경인고속도로 남쪽 녹지대의 중심 봉우리이다. 해발 100m도 안 되는 구릉이지만 아담하며 숲이 무성하다.
1914년 일본인들이 붙인 일본식 정명 낭속정(浪速町)은 일본어 발음이 나니와초인데 일본 냄새가 물씬 난다.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1200명의 병력을 조선반도로 실어오던 수송선 코우싱호(高陞號, 영국 국적 상선)를 충남 풍도(豊島) 앞바다 해전에서 격침시킨 전함 나니와함(浪速艦)을 기념하며 붙인 지명이다. 나니와함은 1886년 영국 뉴캐슬의 워커조선소에 발주해 건조한 전장 91.4m, 폭 14m에 1600마력의 제원을 갖고 수십 문의 함포로 무장한 순양함이었다. 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나니와함의 승전으로 전세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서창동에 붙였던 나니와초는 연수구 송도동 지명의 연원인 마츠시마함(松島艦)처럼 치욕적인 지명이었다.
인천의 오지였던 서창동은 제2경인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해 나가면서 형질을 바꾸기 시작했다. 서단에는 서창인터체인지가 들어섰고, 갯벌과 무논으로 남아 있던 남쪽 지역은 서창2개발지구로 지정돼 보금자리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원규 pik@itimes.co.kr
2014년 05월 2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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