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40/남촌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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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5.16)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40
바닷물 끓여 정제염 만들던 능동
광복후 옛 면 이름 따 남촌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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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구 남촌동(南村洞)은 주안동처럼 옛 면단위 명칭이 동명으로 된 곳이다.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는 오늘의 관교동에서 남쪽에 있는 면을 남촌면이라 했고, 오늘의 남촌동은 거기 속한 촌락이었다. 조선정조 13년(1789)년 자료인<호구총수>에는 남촌면 동네명이 1·2·3·4(里)로 기록됐는데, 4리가 이곳이었던 걸로 보인다. 1842년과 1899년 관찬(官撰)한<인천부읍지>는 모두 염촌(鹽村)과 능동(陵洞)으로 기록했다.
1903년 인천부가 동네명을 정리할 때 염촌 하나로 했고, 1906년에는 와우리(臥牛里)로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1911년 일제가 강제합병 직후 조사한 발간한<조선지지자료>는 능곡(陵谷, 우리말 기록 능꼴), 와우동(臥牛洞, 원우꼴), 염촌(鹽村, 번말)을 기록했다.
1914년 인천 일부와 부평을 합해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남촌면과 조동면을 합해 남동면이라 고칠 때 거기 속하고 와우리를 대표지명으로 기록했다. 1940년 4월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식 정명 오보정(五寶町)으로 바꾸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오늘처럼 남촌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날의 면 이름을 살려두고 싶은데다가 파인 김동환의 시 <산너머 남촌에는>을 연상하게 하는 정겨운 지명이라 남촌동이라 붙인 듯하다. 그러나 능동 혹은 와우동으로 함이 지명연원에 가까이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마을 원로들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필자 선친의<인천지명고>(1993)는 남촌동의 오랜 취락으로 벗말·웃말·가운뎃말·뒷말·먼골말 등을 들고 있다. 오늘날은 상촌·중촌·하촌·소촌 등으로 불리는데, 위의 재래지명들이 바뀐 것이다.
가장 주목되는 곳은 염촌이다. 남촌동의 아래쪽으로서 벗말과 범말 등으로 불렸는데, 오늘날 남동공단 초입이다. 민속학자들은 한국 천일염의 역사를 1907년 주안염전을 효시로 보고, 이전에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다고 설명한다. 염벗(釜屋)이란 바로 소금을 끓여 정제하는 집, 혹은 그 작업을 하는 장소이다.<세종실록지리지>는 '인천에 염소(鹽所) 6개가 있다'고 했는데, 남촌동 벗말도 그중 하나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능동(와우동)은 남촌동의 본마을이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염벗 마을에 왕릉이 있었을까? 그런 개연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인천의 중구 답동처럼 취락들이 늘어서 있어서 '는골'이라 했고, 자음접변 음운변화를 일으켜 '는골>능골'로 발음하게 됐다. 그걸 능곡이라고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답동은 는골이 모음동화작용으로 논골로 됐다가 무논이 있는 마을로 잘못 해석돼 畓洞으로 기록됐다.)
남촌동 능골 지형도 그렇게 늘어서 있었다. 필자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다. 대건고교 교사를 하며 연속 두 해 남촌동으로 학생들을 모내기 봉사에 인솔해 가서 이곳저곳 모내기 논에 분산배치하고 늘어선 마을을 왕래했던 일이 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워서 인천이 마지막 남은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크게 변해버려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조상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김종욱(56세) 선생은 상촌이 지금 남촌초등학교와 남촌성당이 있는 곳, 중촌이 풍림아파트 단지가 앉은 곳, 하촌은 주민센터가 있는 마을이라고 말한다.
능골(능동)을 와우동으로 기록한 것은 이곳이 와우산이라는, 마치 소가 엎드린 듯한 작은 구릉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형질이 많이 변해 정말 소가 엎드린 형상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남촌동의 명물은 뭐니뭐니 해도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사진)이다. 옛날에는 4번 버스 종점 도톰한 언덕 위에 장려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지금은 상촌 남촌초교 담장 너머 남촌 성당 경내에 남아 있다. 옛날 웅장하고 아름답던 자태보다는 상태가 나빠 보인다. 남촌동에는 수령 수백 년 된 엄나무도 있었다. 음력 7월 이곳에서 동제(洞祭)인 도당굿을 시작해서 은행나무 아래서 마지막 고사를 지내며 끝냈다. 마을사람들이 소를 잡아 고사를 지내고 골고루 나눠 먹으며, 반목한 사람들은 화해하고 미담은 나누는 등 소중하게 공동체를 유지했다. 지금은 엄나무도 빌라촌 개발로 사라지고 도당굿도중단됐다.
김종욱 선생 말에 의하면 잃어버린 소중한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청년회 중심으로 소고기를 추렴해 나누는 전통은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도당굿도 매년 할 수 없어도 3년에 한 번씩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많아진데다 은행나무가 성당 경내에 있어서 쉽지 않겠지만, 무속을 배제한 축제형식으로라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남동구청이 장려와 후원을 하면 좋겠다.
2014년 05월 1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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