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의 名所] 인천이야기-05(한국전쟁 복구와 도시개발<1945∼1969년>)
작성자 : 이은용
작성일 : 2005.05.21 17:14
조회수 : 3,260
본문
(2)한국전쟁 복구와 도시개발(1945∼1969년)
인천은 해방 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지역이다. 따라서 미군정도 맨 먼저 실시됐다. 미군정은 인천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했고, 당시 일본인 등 외국인들의 개인재산을 적산관리국을 둬 관리했다. 한편으로는 민선시장 선출에도 관여했다.
통계연보에 게재된 인천의 재정현황에 대한 기록은 1957년도부터며, 그해 세출규모는 약 1억원∼2억원 안팎이었다. 당시 특별회계 항목은 수도비와 주택관리비, 제1토지구획정리사업에 대한 비용으로 구성돼 있다.
1940년대 일본침략기 동안 수행됐던 송림·부평·숭의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는 전쟁 후 재정적 문제로 준공이 연기됐다. 인천은 당시 도심부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인천항의 기능복구와 도심복구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중구 답·신포·사·신생동 일원의 제1구획정리사업지구가 우선 시행됐다. 당초 사업기간은 1959년 7월까지였으나, 재원 및 기술요원 부족, 피난민들의 무단점용, 지주의 반대 등으로 1967년 3월에서야 완공됐다.<관련 화보 20면>
1935년 시행됐던 제2도크는 안벽기초공사를 시행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물자와 동력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장기간 방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전쟁때에도 인천항은 물량장과 호안 350m가 파괴되고, 잔교 및 창고 등이 대부분 파손돼 하역능력이 거의 상실됐다.
1950년대는 해방 후 정치적 불안과 전쟁 등으로 공유수면매립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관보에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얻은 지역은 염전축조를 목적으로 한 옥련동 산 103 일원 17만여평과 논현동 111과 고잔리 22의2 일원이 전부였다.
1960년대 들어 인천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및 경인지구특정지역개발계획에 따라 수도권내 공업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 정부의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은 지역 제조업 발전에도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수출산업공단과 주안기계공단 등이 생겨나고, 제조업비중이 3차산업을 넘어서게 된다. 특히 음·식료업과 의복·섬유업 등 경공업 비중은 물론이고, 기계업종의 중공업도 동시에 성장했다.
1963년 10월에는 서울·인천특정지역계획이 제정됐다. 이는 공단개발을 통한 지역개발 및 파급효과의 주변확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서울∼인천 고속도로와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되고, 이듬해 제1차 국토종합계획이 준비되면서 특정지역 추진에 대한 의욕이 크게 줄어들다가, 급기야 1982년 해제되고 말았다.
1962년 도시계획법 제정 당시 6개지구로 구분됐던 인천의 용도지구는 1965년 10개지구로 세분된다. 동인천역앞 중앙로 일대와 공설운동장 앞길, 부평로 등 당시 인천의 주요 시가지는 도로면에서 일정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는 고도지구로 지정됐다. 이중 중앙로는 미관지구로 중복지정돼, 그때부터 인천의 중심도시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한국전쟁 등으로 잠시 주춤하던 공유수면매립사업이 고개를 든 것도 이 시기부터다. 그 당시 국내 공유수면 매립이 농업용지 조성을 목적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인천은 공장용지(전체의 54.8%)와 항만조성이 주류를 이뤘다. 월미도와 소월미도 주위를 메워 방파제가 축조됨으로써 호안 전체가 도크역할을 하고, 항만 골격도 갖춰졌다. 제2선거공사로 하인천의 기존 어항과 여객선 부두가 소월미도 남쪽으로 이전하는 등 1971년까지 매립이 이어져 지금의 수산센터와 임해공업지대가 조성됐다.
숭의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은 처음에는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963년 제45회 전국체전을 치른 다음해 부터 재건립사업을 진행한 후에야 비로소 주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 배구장 등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학교는 1969년말 기준으로 총 132개교로 집계됐다. 국·공립이 56개교, 사립이 76개교, 시설기준법에 의한 학교가 12개소였다. 공동묘지는 1968년 현재 부평묘지를 비롯해 28개소로, 면적은 51만2천885평에 달했다. /백종환기자
----<사진설명>">k2@incheontimes.com
----<사진설명> 1960년대초만 해도 인천의 종합운동장은 시설 자체가 매우 옹색했었다. 그러다 1963년 전국체전을 치르고 난 뒤 종합운동장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남구 숭의동에 공설운동장터에 운동장을 다시 건립하게 됐다. 당시에는 주경기장과 야구장, 소기구장, 배구장 등을 갖춘 제법 그럴듯한 종합운동시설이었다.
인천은 해방 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지역이다. 따라서 미군정도 맨 먼저 실시됐다. 미군정은 인천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했고, 당시 일본인 등 외국인들의 개인재산을 적산관리국을 둬 관리했다. 한편으로는 민선시장 선출에도 관여했다.
통계연보에 게재된 인천의 재정현황에 대한 기록은 1957년도부터며, 그해 세출규모는 약 1억원∼2억원 안팎이었다. 당시 특별회계 항목은 수도비와 주택관리비, 제1토지구획정리사업에 대한 비용으로 구성돼 있다.
1940년대 일본침략기 동안 수행됐던 송림·부평·숭의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는 전쟁 후 재정적 문제로 준공이 연기됐다. 인천은 당시 도심부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인천항의 기능복구와 도심복구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때문에 중구 답·신포·사·신생동 일원의 제1구획정리사업지구가 우선 시행됐다. 당초 사업기간은 1959년 7월까지였으나, 재원 및 기술요원 부족, 피난민들의 무단점용, 지주의 반대 등으로 1967년 3월에서야 완공됐다.<관련 화보 20면>
1935년 시행됐던 제2도크는 안벽기초공사를 시행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물자와 동력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장기간 방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전쟁때에도 인천항은 물량장과 호안 350m가 파괴되고, 잔교 및 창고 등이 대부분 파손돼 하역능력이 거의 상실됐다.
1950년대는 해방 후 정치적 불안과 전쟁 등으로 공유수면매립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관보에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얻은 지역은 염전축조를 목적으로 한 옥련동 산 103 일원 17만여평과 논현동 111과 고잔리 22의2 일원이 전부였다.
1960년대 들어 인천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및 경인지구특정지역개발계획에 따라 수도권내 공업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 정부의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은 지역 제조업 발전에도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수출산업공단과 주안기계공단 등이 생겨나고, 제조업비중이 3차산업을 넘어서게 된다. 특히 음·식료업과 의복·섬유업 등 경공업 비중은 물론이고, 기계업종의 중공업도 동시에 성장했다.
1963년 10월에는 서울·인천특정지역계획이 제정됐다. 이는 공단개발을 통한 지역개발 및 파급효과의 주변확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서울∼인천 고속도로와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되고, 이듬해 제1차 국토종합계획이 준비되면서 특정지역 추진에 대한 의욕이 크게 줄어들다가, 급기야 1982년 해제되고 말았다.
1962년 도시계획법 제정 당시 6개지구로 구분됐던 인천의 용도지구는 1965년 10개지구로 세분된다. 동인천역앞 중앙로 일대와 공설운동장 앞길, 부평로 등 당시 인천의 주요 시가지는 도로면에서 일정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는 고도지구로 지정됐다. 이중 중앙로는 미관지구로 중복지정돼, 그때부터 인천의 중심도시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한국전쟁 등으로 잠시 주춤하던 공유수면매립사업이 고개를 든 것도 이 시기부터다. 그 당시 국내 공유수면 매립이 농업용지 조성을 목적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인천은 공장용지(전체의 54.8%)와 항만조성이 주류를 이뤘다. 월미도와 소월미도 주위를 메워 방파제가 축조됨으로써 호안 전체가 도크역할을 하고, 항만 골격도 갖춰졌다. 제2선거공사로 하인천의 기존 어항과 여객선 부두가 소월미도 남쪽으로 이전하는 등 1971년까지 매립이 이어져 지금의 수산센터와 임해공업지대가 조성됐다.
숭의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은 처음에는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963년 제45회 전국체전을 치른 다음해 부터 재건립사업을 진행한 후에야 비로소 주경기장과 야구장, 정구장, 배구장 등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학교는 1969년말 기준으로 총 132개교로 집계됐다. 국·공립이 56개교, 사립이 76개교, 시설기준법에 의한 학교가 12개소였다. 공동묘지는 1968년 현재 부평묘지를 비롯해 28개소로, 면적은 51만2천885평에 달했다. /백종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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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60년대초만 해도 인천의 종합운동장은 시설 자체가 매우 옹색했었다. 그러다 1963년 전국체전을 치르고 난 뒤 종합운동장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남구 숭의동에 공설운동장터에 운동장을 다시 건립하게 됐다. 당시에는 주경기장과 야구장, 소기구장, 배구장 등을 갖춘 제법 그럴듯한 종합운동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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