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퍼온글)
본문
퍼온곳 : 서울신문917.12.2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 고향 인천의 사진관에서 해병 6기로 참전한 인천 지역 중학생들이 입대 5주년을 기념해 1956년 1월 24일 찍은 사진. 해병 6기는 대부분 인천지역 중학교 4~6학년 학생들로 구성돼 인천기수라 불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지역 중학생 2500명이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중학교 4~6학년생 600여명은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고 나머지는 부산에서 통신병 등으로 자원입대했다. 이 중 208명이 전사했다.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이계백.
‘인천학생 6·25 참전관’
▲ ‘인천학생 6·25 참전관’
이계백 인터뷰
일시 1997년 6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이계백(인천상업중 5학년때 자원입대)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이규원 치과원장(6·25 편찬위원장)
▲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내가 겪은 6·25 사변(事變)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나는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생이었으며, 북한 인민군의 학정으로 인천송림국민학교 정문 앞 친구 유은성 집에서 몰래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 인민군이 그냥 구둣발로 막 들어와 대뜸 “너, 이계백이지!” 하면서 나를 인천상업중학교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인천상업중학교는 인민군 본부였고 그곳에는 좌익 빨갱이 학생들로 들끓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고, 방망이로 나를 쳤다. 이유는 아버지(우익 인사)와 형님(우익 학생)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 씩 고문을 하고, 몇 일이 지났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고문을 당하고 나니까 몸은 이미 말도 못하게 망가져 갔었다.
미국 남북전쟁과 한국 6·25 사변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죽음보다 더 혹독했던 빨갱이들의 고문
며칠 뒤 인민군 장교가 “이놈의 반동분자 즉결처분 해야겠구먼!” 하며 권총을 빼들고 나를 겨누는 것이었다.
친구 유은성이는 그 후 친구인 내가 걱정이 되어 면회를 와서 도시락을 넣어주고 그랬었는데 그날도 또 면회 왔다가 이 권총 장면을 보고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내 곁에 와서는 “친구를 살려 달라!”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장교는 “저놈부터 죽여야 하겠구먼!” 하면서 권총을 내 친구 유은성한테 겨누면서 막 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저 친구는 사상(思想)은 모르며 학업에만 열중하는 학생인데 저 친구가 나 때문에 죽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며 애원을 했더니 인민군 장교는 조금 수그러지면서 내 친구 은성이는 풀어 주고 나 또한 그 위기를 겨우 면하고 며칠 뒤 석방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 괴뢰군이 후퇴하여 인천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우익 활동을 하셨던 형님(이계송·고려대 2학년)은 인천학도의용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6·25 사변 때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바뀌는 세상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사람에 대한 조사, 피란민 안내, 요소요소 경비, 학생선도 등 중요한 일을 인천학도의용대가 했다.
6·25사변 때 인천에서 그때 중·고등학생들은 큰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있었기에 인천학도의용대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이계백(뒷줄 왼쪽)과 함께 남하하여 해병 6기로 입대하여 진해의 사진관에서 1951년 9월 15일 찍은 참전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흥주(공립인천중학교 5학년), 이광용(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뒷줄 오른쪽이 정순창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1950년 12월 18일 내 생애 운명의 날
11월이 들어서자 중공군참전으로 UN군과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본부에서 남하할 준비를 하고 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또 남았다가 북한 괴뢰군(傀儡軍) 점령하에서의 그 몸서리 처지는 고통을 당하기 싫어서였다.
1950년 12월 18일날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도(先導)하여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열초등학교)를 목적지로 삼고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도원고개를 넘어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 행진곡에 발맞추어 구월동을 지나 계속 걸어가서 밤 늦게 안양에 도착하여 1박을 한 후에 계속 걸어가서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을 지나 대전, 대구, 청도를 거쳐서 삼랑진을 지나 마산역 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7일 만이었다.
나는 대구를 지나 경산, 청도, 밀양을 걸어가면서 논밭에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의 얼거나 굶어 죽은 시체를 많이 봤다.
내 친구 유은성과 나는 다른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처럼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3훈련소(통영충렬국민학교)로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역에 머물렀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51년 1월 4일 이계백과 함께 해병 6기로 자원입대 후 참전, 1952년 6월 12일 문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수(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삼부자. 왼쪽부터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근표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6·25 편찬위원장).
▲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951년 1월 4일 이계백과 함께 해병 6기로 자원입대 후 참전, 1952년 6월 12일 문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수(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삼부자. 왼쪽부터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근표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6·25 편찬위원장).
해병 6기 신병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때마침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모집이 있었다. 친구 은성이가 해병 6기 신병모집에 같이 지원하자고 하기에 같이 지원했다.
해병 6기는 인천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인천출신 중학생(4~6학년, 현재의 고등학교 1~3학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합격 후 진해해병교육대에 가게 되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4일이었다. 이날부터 해병(海兵)교육을 받는데 교육은 빳다를 맞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때 빳다 맞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북한 공산 괴뢰군(傀儡軍)의 고문으로 악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때 20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 해병이 되는 것이어서 빳다를 못 견디고 도망가기도 했다.
참기 힘들고 모진 훈련이 다 끝나고 드디어 정식 입대 날짜가 다가왔고, 1951년 1월 24일 정식해병이 되었다.
5년 2개월 간의 해병대 군복무
나는 진해해병학교로 배치되었다. 아마 신상명세서에 인천상업중학교 출신이 참고된 것 같았으며, 해병학교에서 1년 3개월을 보냈다.
그때쯤 전후방 교류가 있어 전방을 지원했다. 해병여단이 창설되어 금촌에 있는 여단본부에 전속되어 1956년 3월 22일 만기 제대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6·25 사변이 발발하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북한 괴뢰군의 치하에서의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지옥(地獄)이었다.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의 긴 시간이었다.
우리들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발자취와 전사한 인천학생들과 전사(戰死)하신 스승님의 기록을 남겨서 후대에 전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경종·이규원 2부자(父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로 고마워하는 나의 마음을 전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6회를 마치며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현 인천고교 2학년) 학생 이계백은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지원입대하였다.
이계백처럼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학생은 2500명이고 그 중 208명이 전사하였다.
6년제 중학교 2~6학년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208명 인천학생들을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은 인천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에도 인천학생들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기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치과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입력 : 2017-12-2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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