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의 名所] 인천이야기-08(광역·국제도시화<1990∼2001년>)
작성자 : 이은용
작성일 : 2005.05.31 17:23
조회수 : 3,470
본문
인천도시계획사-(5)1990~2001년 백종환기자
(5)광역·국제도시화(1990∼2001년)
인천은 1992년 인구 200만명을 돌파한다. 3년 뒤 광역시로 승격되고, 99년에는 제80회 전국체전을 치렀다. 1997년 2002 한·일월드컵 개최지로 확정된 인천은 지하철 1호선개통(99년 10월), 인천공항 개항(2001년 3월), 문학경기장 준공(2002년 1월) 등 각종 도시인프라도 이 시기에 구축됐다. 시 재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00년 기준으로 예산규모가 3조7천782억원에 이르렀다. 1990년에 비해 3.6배, 1980년에 비해 무려 67.4배가 늘어난 수치다.
95년 1월1일을 기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명칭이 바뀌고 강화군과 김포군 관할의 검단면,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이 인천으로 편입됐다. 북구(32개동)는 부평(21개동)과 계양(11개동)구로, 남구(31개동)는 남구(23개동)와 연수구(8개동)로 각각 나뉘었다.
행정구역 면적은 954.2㎢로 직할시(339.61㎢) 때에 비해 2.8배 이상 늘었다. 이후 공유수면 매립 등으로 꾸준히 면적이 늘어 지금은 980.04㎢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 가장 주목을 받는 사업은 뭐니뭐니 해도 송도신도시 개발이다. 1979년부터 택지용지로 공유수면 매립계획이 세워졌던 송도신도시는 밑그림이 완전히 그려진 시기가 1992년이다. 당시 계획은 21세기 국제화시대에 대비하고 계획적으로 시가지를 조성하며, 부족한 택지 공급을 통해 지방재정 확보에 기여하자는 취지였다. 계획의 구체성이 결여돼 있고, 수요에 대한 대응력 부족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해도, 택지난과 지가상승 등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해 이뤄진 계획이었다. 주택용지 공급을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 인천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신도시로 개념이 바뀐 것은 지식정보산업단지가 이곳에 유치되면서 부터다. 이때 송도-영종-청라지구를 축으로 하는 트라이포트 구상이 나왔고, 정보화·국제화·생태도시 개발에 대한 전략도 수립됐다.
남동구 논현동 수도권해양생태공원은 염생습지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소금생산을 목적으로 염전이 만들어진 후 1997년까지 소금생산이 이뤄졌다. 총 148만㎡의 수도권해양생태공원은 현재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됐고, 현재 조성사업이 진행중이다.
인천국제공항은 1992년 영종·용유도간 방조제공사를 기점으로 8년여의 공사과정을 거쳐 2001년 3월 개항했다. 단일건물로는 동양 최대의 여객터미널, 완벽한 정보통신시스템, 서울을 연결하는 전용고속도로 등 세계 어느 공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시설물로 꼽힌다.
인천문학경기장은 열악한 체육시설을 확충하고 제80회 전국체전(1999년)을 개최할 목적으로 94년 7월 착공됐다. 그러나 97년 12월 인천이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규모와 규격이 FIFA기준으로 재조정돼, 2002년 1월에서야 공사를 마쳤다. 산을 깎아 만든 대지 조성과정에서 생겨난 암반과 토사는 송도신도시 간척사업 방파제로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종환기자 k2@incheontimes.com
(5)광역·국제도시화(1990∼2001년)
인천은 1992년 인구 200만명을 돌파한다. 3년 뒤 광역시로 승격되고, 99년에는 제80회 전국체전을 치렀다. 1997년 2002 한·일월드컵 개최지로 확정된 인천은 지하철 1호선개통(99년 10월), 인천공항 개항(2001년 3월), 문학경기장 준공(2002년 1월) 등 각종 도시인프라도 이 시기에 구축됐다. 시 재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00년 기준으로 예산규모가 3조7천782억원에 이르렀다. 1990년에 비해 3.6배, 1980년에 비해 무려 67.4배가 늘어난 수치다.
95년 1월1일을 기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명칭이 바뀌고 강화군과 김포군 관할의 검단면,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이 인천으로 편입됐다. 북구(32개동)는 부평(21개동)과 계양(11개동)구로, 남구(31개동)는 남구(23개동)와 연수구(8개동)로 각각 나뉘었다.
행정구역 면적은 954.2㎢로 직할시(339.61㎢) 때에 비해 2.8배 이상 늘었다. 이후 공유수면 매립 등으로 꾸준히 면적이 늘어 지금은 980.04㎢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 가장 주목을 받는 사업은 뭐니뭐니 해도 송도신도시 개발이다. 1979년부터 택지용지로 공유수면 매립계획이 세워졌던 송도신도시는 밑그림이 완전히 그려진 시기가 1992년이다. 당시 계획은 21세기 국제화시대에 대비하고 계획적으로 시가지를 조성하며, 부족한 택지 공급을 통해 지방재정 확보에 기여하자는 취지였다. 계획의 구체성이 결여돼 있고, 수요에 대한 대응력 부족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해도, 택지난과 지가상승 등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해 이뤄진 계획이었다. 주택용지 공급을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 인천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신도시로 개념이 바뀐 것은 지식정보산업단지가 이곳에 유치되면서 부터다. 이때 송도-영종-청라지구를 축으로 하는 트라이포트 구상이 나왔고, 정보화·국제화·생태도시 개발에 대한 전략도 수립됐다.
남동구 논현동 수도권해양생태공원은 염생습지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소금생산을 목적으로 염전이 만들어진 후 1997년까지 소금생산이 이뤄졌다. 총 148만㎡의 수도권해양생태공원은 현재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됐고, 현재 조성사업이 진행중이다.
인천국제공항은 1992년 영종·용유도간 방조제공사를 기점으로 8년여의 공사과정을 거쳐 2001년 3월 개항했다. 단일건물로는 동양 최대의 여객터미널, 완벽한 정보통신시스템, 서울을 연결하는 전용고속도로 등 세계 어느 공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시설물로 꼽힌다.
인천문학경기장은 열악한 체육시설을 확충하고 제80회 전국체전(1999년)을 개최할 목적으로 94년 7월 착공됐다. 그러나 97년 12월 인천이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규모와 규격이 FIFA기준으로 재조정돼, 2002년 1월에서야 공사를 마쳤다. 산을 깎아 만든 대지 조성과정에서 생겨난 암반과 토사는 송도신도시 간척사업 방파제로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종환기자 k2@incheo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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