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인천 송도고 개교 100주년
작성자 : 이동열
작성일 : 2006.10.25 23:30
조회수 : 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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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송도고 개교 100주년
민족교육의 산실, 인재 배출의 요람 인천 송도고등학교(교장·박상수)가 3일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한·일 합방, 광복, 한국전쟁, 근대화 등 격동의 역사를 거쳐 교육의 내실화를 일궈내며 전국의 명문 사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송도고는 민족 지도자이자 선각자인 좌옹 윤치호 선생이 1906년 개성 송악산 기슭 산지현에 현 송도고의 모태인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건립하면서 출발했다.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발행인을 역임한 윤 선생은 민족·자주·독립의 구국운동이야말로 민중을 계도해 주체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라 믿고 14명의 학생을 모아 공부하던 야학을 학교로 확대,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송도고는 자주독립, 경천애인(敬天愛人), 봉사(奉事)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민족사학'으로서 중추 역할을 담당해 오면서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에도 불구, 민족의 혼을 불태우며 교육활동을 통해
자주독립의 열의를 이어 나갔다.
해방을 맞았지만 기쁨도 잠시, 곧 한국전쟁이 터지고 끝내 개성이 미수복지로 남게 돼 남하하게 됐다. 50년 간 일궈 온 교육터전이 일순간 무너졌지만 동문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개교를 갈망했다. 1952년 부산에서 재단 이사회를 열고 제7대 교장을 역임한 김준옥 선생을 주축으로 재개교를 준비, 같은 해 4월5일 인천 송학동 가교사에 피난학생 500명을 수용해 다시 문 열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동참하고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를 벌이는 등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 왔던 송도고의 맥을 이어받아 19개월 간의 피난시대를 끝내고 인천 답동에 제2의 송도고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송도고는 협소한 공간문제로 학생들 학업이 어려워지자 동양제철화학㈜ 이회림 회장(현 송도학원 이사장)의 도움으로 현재의 연수구 옥련동에 새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1982년 이 회장이 제4대 이사장으로 새롭게 취임한 이후 '사람이 먼저 되라'는 이 회장의 좌우명을 바탕으로 송도고는 인재 양성에 중점을 두고 제3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개교 한 세기를 보낸 송도고는
이제 또 다시 새 역사를 쓰기 위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총동창회의 '송도고 100년사 편찬'에 이어 남동구 구월동에 대지 90평, 연면적 150평, 지상 3층 규모의 송도중·고등학교 총동창회관 건립, 높이 10m의 100주년 기념 조형탑 건축 등을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 엠블렘을 제작하고 개교 100주년 기념 중학생 학력경시대회를 열어 우수 인재를 양성하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송도고는 끊임없는 도약을 위해 오늘밤에도 불을 밝히며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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