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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인천역사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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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인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여러 곳(인천, 강화, 영종도)에서 석기시대 및 청동기 시대의 문화유적이 발굴되었다. 특히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과 참성단(塹城壇)은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이 고장 명칭은 미추홀이다. 이 미추홀에는 백제가 건국될 당시 비류(沸流)의 미추(홀)국<彌鄒(忽)國>이 있었다. 그러나 미추(홀)국이 인천의 어느 지역이었는지 그 절대위치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고 ▲ 영종 송산 선사유적지 ◀ 학익고인돌.《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여지도서(餘地圖書)》등에 문학산성(文學山城)이 그곳으로 전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추홀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게 되는 장수왕 때(413∼491)의 일이다.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점유하고(475) 이 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다. 그 후 백제의 성왕 29년(551, 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가 공동작전을 펴서 백제는 한강 하류역 6군(郡)을 점령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역 10(郡)곳을 점령하였으나 2년 뒤인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역마저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이 완전히 신라의 판도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 16년(757)에 토박이 말로 되어 있던 매소홀현(買召忽縣)을 한자명인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하면서 율진<律津 ; 과천군(果川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 문학산성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소성현은 그대로 유지되다가 현종 년(1018)에 수주<樹州 ; 부평(富平)>에 속하였다. 그 후 숙종조에 이르러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李)씨<이자연의 장녀>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고, 인종조에는 인종의 어머니 문경태후(文敬太后)<처음에는 순덕왕후(順德王后)라 하였음, 이자겸(李資謙)의 2녀>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가호(加號)되었다. 이와 같은 승격이 모두 인주 이씨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 말기인 공양왕 2년(1390)에 인천은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는데 그 사유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성립하자 태조 원년(1392)에 인주(仁州)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천군(仁川郡)이 되어 비로소 인천(仁川)이란 읍호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조 6년(1560)에 이르러 인천군이 또다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이 되었다. 이것은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세종비>의 외향(外鄕)이었기 때문이다. 강희맹(姜希孟)의 『승호기(陞號記)』에 의하면 인천의 망족(望族)인 문씨(文氏)의 딸이 조선왕조의 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에게 시집가서 낳은 심온(沈溫)의 딸이 바로 세종비가 된 소헌왕후 심씨이다. 그러니 인천이 소헌왕후의 진외가(陣外家)고을이 되는 것이다. 이 후 인천이 역승(役僧)의 출생지라 하여, 또는 역변(逆變)이 있었다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말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여 왔다. 역승(役僧)이라 함은 숙종 14년(1688)에 여환(呂還) 등 11인이 양주(楊州)를 무대로 항간으로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신령(神靈)이라 칭하면서 반역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역변(逆變)이라고 하는 것은 순조 12년(1812)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러한 변고가 있을 때에는 그 고을을 강등시켰다가 10년이 경과한 후 복구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인천도호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인천경내(仁川境內)가 부치(府治)에서 동쪽으로 안산군계(案山郡界)까지 41리(理), 금천한계(衿川限界)까지 34리이고, 남쪽으로 대해(大海)까지 7리이며, 서쪽으로 제물량(祭物梁)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 부평군계(富平郡界)까지가 24리이며, 경도(京都)에서 떨어지기 77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읍치가 있던 관교동(官敎洞)을 기준으로 하여 서술된 것으로서 소래산(蘇萊山)이 인천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쪽으로 지금의 시흥시 일부지역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인천부의 속도(屬島)로서 서쪽 27리에 주위가 55리이며 목장(牧場)을 두고 있는 자연도(紫燕島, 영종도), 서쪽 40리에 주위가 10리이며 목장이 있는 삼목도(三木島), 서쪽 55리에 주위가 25리이며 목장이 있는 용유도<龍流(游)島>, 서쪽 57리에 주위가 28리이며 목장이 있는 무의도(無依島), 용유도(龍流島)와 연해 있으며 주위가 5리인 사탄도(沙呑島), 서쪽 12리에 신제단(神祭壇)이 있는 원도(遠島), 서쪽 14리에 위치 ▲ 고지도에 나타난 인천부 하는 수이도(愁伊島), 남쪽 9리에 위치하는 언질도<言叱島; 속칭 관품산(官品山)>, 서쪽 120리에 주위가 30리이며 목장이 있는 덕적도<德積島 ; 성종 17년에 남양부(南陽府)>로부터 이속(移屬)>, 서쪽 180리에 주위가 10리이며 목장이 있는 사야곶도(士也串島, 성종 17년에 남양부로부터 이속)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섬들이 옹진군에 속해 있다. 조선 후기인 영조조(1725∼1776)에 편찬된 《여지도서》<인천도호부>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의 방리(坊里)가 10개 面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10개 면은 부치(府治 ; 관교동)동서 각 5리에 부내면(府內面), 동쪽 15리에 조동면(鳥洞面), 동남 30리에 신현면(新峴面), 동남 40리에 전반면(田反面), 동쪽 40리에 황등천면(黃等川面), 남쪽 10리에 남촌면(南村面), 서남 10리에 원우미면(遠又彌面), 서쪽 15리에 다소면(多所面)등이다. ◀ 개항당시 제물포. 고종 20년(1883)에 인천개항(仁川開港)이 이루어지고 제물포에 감리서(監理暑)가 설치되자 대개 감리<監理 ;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가 부사(府使)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고종 32년(1895)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일환으로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331군(郡)으로 통합하여 부(府)에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 이 때 감리서(監理署)는 폐지되고 인천이 23부(府)의 하나가 되어 인천·부평·김포·양천·시흥·안산·과천·수원·남양·강화·교동 등 12郡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896, 건양 원년)에 다시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13도(道)·1목(牧)·9부(府)·329군(郡)으로 나누었는데 인천은 9부(府)의 하나로서 경기도에 속하게 됨으로써 감리서(監理署)가 부활되었다. 그 후 광무 10년(1906)에는 다시 감리서가 폐지되고 인천부윤(仁川府尹)이 감리사무(監理事務)를 수행하였다. 1910년에 주권을 상실하고 식민통치가 시작되어 총독부(總督府)가 설치되자 인천은 조선총독부관제(朝鮮總督府官制)에 의하여 부(府)가 설치되고 부행정(府行政)이 실시 되었다. 그 후 1914년에 부·군·면을 통폐합할 때 인천부의 부역(府域)이 대폭 축소되어 개항장<開港場 ; 부내면(府內面)과 다소면(多所面)의 일부>으로 국한되고 그 나머지 지역이 부평군(富平郡)과 합하여 부천군(富川郡)이 신설되었다. 부천(富川)이란 부평과 인천(仁川)의 머리글자를 합한 명칭이다. 1936년에 제1차 부역(府域)확장이 이루어져 부천군의 다주면<多朱面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다소면(多所面)이 일부와 주안면(朱岸面)이 합쳐져 다주면(多朱面)이 됨>과 문학면<文鶴面 ; 과거 인천부치(仁川府治)가 있던 부내면(府內面)>일부가 편입되었다. 1940년 제2차로 부역(府域)확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다시 부천군의 문학(文鶴)·남동(南洞)·부내<富內 ; 부평부치(富平府治)가 있었음>·서곶(西串)등 4개면이 편입됨으로써 종전의 인천부역(仁川府域)이외에 부평군의 대부분이 인천부역으로 편입되게 되었던 것이다. 부평(富平)은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고 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년(757)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 장제군(長堤郡)은 수주(樹州)로 개칭되고 성종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고려는 성종조에 이르러 그 때까지 호족(豪族)들의 수중에 있던 지방행정을 장악하기 사작하여 성종 2년(983)에 12목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하였는데 이 12목도 중점적인 설관(設官)에 불과하였다. 그 후 성종 14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동시에 중요한 주군에 도단련사(都團鍊使)·단련사(團練使)·자사(刺史)등을 파견하였다. 이때 수원(水州)등에는 도단련사가 파견되고 수주(樹州)등에는 단련사가 파견되었는데 목종 8년(1005)에 이르러 혁파되고 현종 9년(1018)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현종 9년에는 지방행정구역에 큰 개편이 이루어져 전국에 4대도호부(大都護府)·8목(목)·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관(懸鈴官)이 설치되었는데 수주(樹州)는 56지주군사(知州郡事)의 하나로 지주사(知州事)가 설치되었다. 그 뒤 의종 4년(1150)에는 수주(樹州)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되었는데 안남(安南)은 계양산(桂陽山)의 다른 이름인 안남산(安南山)에서 따온 것이다. 고종 2년(1215)에는 계양산의 이름을 따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으며 몽고 침략 후인 충렬왕 34년(1308)에는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충선왕 2년(1310)에 길주목(吉州牧)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로 개칭 강등되면서 금주(衿州, 시흥군)·동성(童城, 김포군)·공암(孔巖, 김포군)·김포(金浦)·수안(守安, 김포군)등 여섯 군현을 속현으로두게 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이르러서 태종 13년(1413)의 예에 따라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가 되었으며 그 뒤 몇 차례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어 조선말기까지 이르렀다. 부평도호부는 세종 20년(1438)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세종 28년(1446)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그리고 숙종 24년(1698)에는 장릉<章陵 ; 인조의 아버지 원종릉(元宗陵)>에 방화(放火)한 죄인 최필성(崔弼成)의 출생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33년(1707)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동국여지승람》<부평도호부>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부평경내(富平境內)가 부치(府治)에서 동쪽으로 금천현계(衿川顯界)까지 34리, 양천현계(陽川顯界)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 안산군계(安山郡界)까지 48리, 인천부계(仁川府界)까지 15리이며 서쪽으로 대해(大海)까지 14리, 북쪽으로 김포군계(金浦郡界)까지 17리, 통진현계(通津顯界)까지 36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도(屬島)로서 부치(府治)서쪽 14리에 주위가 300보(步)인 물차도(勿次島), 서쪽 10리에 주위가 200(步)인 호도(虎島), 서쪽 15리에 주위가 300보(步)인 응도(應島), 서쪽 15리에 주위가 100보(步)인 정자도(亭子島), 서쪽 10리에 주위가 200보(步)인 문지도(文知島), 서쪽 10리에 주위가 800보(步)인 청라도(靑羅島), 서쪽 8리에 주위가 300보(步)인 일도(一島), 서쪽 6리에 주위가 500보(步)인 장도(獐島), 서쪽 10리에 주위가 800보(步)인 율도(栗島) 서쪽 25리에 주위가 800보(步)인 서천도(西遷島), 서쪽 20리에 주위가 50보(步)인 기도(箕島)가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부평도호부>에 의하면, 부평의 방리(坊里)는 부내면(府內面), 부치(附治)동쪽 5리에 동면(東面), 동쪽 10리에 당산동(堂山洞), 동쪽 15리에 주화곶면(注火串面), 동남 20리에 상오정면(上梧丁面), 동남 20리에 하오정면(下梧丁面), 동쪽 30리에 수탄면(水呑面), 동남 30리에 옥모면(玉毛面), 남쪽 15리에 석천면(石川面), 남쪽 20리에 동소정면(同所井面), 남쪽 5리에 서면(西面), 남쪽 10리에 마장면(馬場面), 서남 20리에 석곶면(石串面), 남쪽 20리에 모월곶면(毛月串面), 북쪽 15리에 황어면(黃漁面)등 15개면(面)이 있다. 고종 32년(1895)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인천부(仁川府)에 속한 부평군(富平郡)이 되었다가 이듬해(건양 원년)경기도에 속하였다. 일제(日帝)통치기인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부평군은 인천부의 나머지지역<인천부는 개항장(開港場)일대로 축소됨>, 즉 구읍인 문학면·영종면·서면·남촌면·덕적면·다소면의 일부지역과 남양군(南陽郡)의 영흥면(零興面)·대곶면(大串面)·강화군(江華郡)의 신도(信島)·시도(矢島)·모도(茅島)·장봉도(長峰島)등 4개 도서를 합하여 부천군(富川郡)이 신설되었다. 그 후 1936년 제1차로 인천부역(仁川府域)확장이 이루어질 때 다주면(多朱面)과 문학면 일부가 인천부로 편입되고, 1940년에 제2차 인천부역 확장 때 다시 문학면의 나머지 지역 ▲ 경인철도 개통 당시 인천 과 남동면·부내면(富內面, 부평 구읍)·서곶면 등 4래 면이 인천부(仁川府)에 편입됨으로써 옛 부평의 대부분 지역이 인천부(仁川府)로 편입되게 되었다. 광복(光復) 수 1973년 소사읍(素 邑)이 부천시(富川市)로 승격됨에 따라 부천군(富川郡)은 없어지고 부천군에 속하였던 각 면은 김포군·시흥군·웅진군·등에 편입이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가 실시됨에 따라 인천부는 시(市)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에는 부천군의 작약도(芍藥島)가 인천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3월 구제도(區制島)가 실시됨에 따라 1968년 1월 1일을 기하여 인천시에는 중구·동구·남구·북구의 4개 구가 설치 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 1월 1일 서구·남동구가 증설되어 6개구가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에는 김포군 계양면(桂陽面)과 옹진군 용유면(龍流面)·영종면(永宗面)이 편입됨으로써 인천직할시의 면적이 338.83㎢에 이르게 되었다.
자료: 인천광역시 통계연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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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기타] http://hyangto.edu-i.org/1_region_profile/1_1_history_detail.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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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님의 댓글
소서이 신라시대이군요. 나는 고려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인주옥은 600년이 넘었네요. 역사 찬란합니다.
오윤제님의 댓글
소서를 소성으로 고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