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인천의 옛모습<펌>
작성자 : 이동열
작성일 : 2007.11.20 19:08
조회수 : 4,124
본문
▶ 미추홀 인천의 모습 - 2천년전 인천
비류는 졸본부여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항해를 하던 중 크고 작은 섬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항구에 닿았습니다.
"닻을 내려라! 내 이곳을 둘러보리라."
문학산에 올라 출렁이는 바다와 작은 섬들, 그 섬들을 헤치고 계속 나아가면 앞으로 다가서는 중국 대륙을 바라보던 비류왕자는 소리쳤습니다.
"내 도읍지로 삼으리라. 이제부터는 미추홀이라 명하노라."
비류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인천은 몹시 분주해지면서 인천 역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문학산에서는 미추홀 성을 쌓느라 고함 소리가 오가며 축조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여러 부족들이 통합해 오면서 비류 백제는 나날이 커졌습니다. 한편으론 다른 부족국가들과 전쟁을 게속하며 영토를 차츰 늘려 나갔습니다.
물품을 가득 실은 교역선이 바삐 오가며 여러 소식과 지식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활발한 교역과 인구의 증가는 농업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한강을 낀 너른 평야를 가진 부평과남촌, 구월 일대에서는 많은 곡식을 생산해내어 비류 백제르 키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무렵 한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엄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졸본 부여왕의 딸 소서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왕모(소서노)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무장을 하고는 몇몇 군사를 거느리고 온조 백제의 위례성을 찾아갔던 소서노가 애통하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소서노는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웠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일으키는데 힘을 다했던 우리나라의 빛나는 영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영웅이 스러져 가는 이 때에 유다에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 유럽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예고하였습니다.
▶ 개항장 인천 - 100년전 인천
그 무렵 인천은 세계의 문호를 열어 개항이 되면서 밀려 들어오는 변화의 물결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천항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들이 가득 들어오고 산더미같이 쌓인 조선의 쌀리 수출되었습니다. 조선 도매상인 객주들은 신상협회를 만들어 일본사람들에 맞서 쌀과 콩따위의 곡물을 취급하기 위해 권업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동인천 일대에는 각 나라에게 조계지로 내주어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일자리를 찾아 움추린 몸으로 조개지를 기웃거리는 조선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농토를 잃고 개항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1897년 3월 22일, 우각리 지금의 창영동으로부터 도원고개로 가는 길목에서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게 철도 부설권을 따 낸 미국과 일본이 공사를 하는 통에 흰 도포를 입은 조선사람들은 구경 행렬에나 낄 뿐이었습니다.
답동 사거리 일대의 바다가 메워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거주지를 넓히느라 4000평에 달하는 매립 공사를 한창 벌이고 있습니다. 경동 싸리재 고개넘어에는 1897년에 준공된 답동 성당이 이국 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뱃길엔 독일 무역상 세창 양행이 운항하는 큰 증기 쾌속선이 오가며 많은 돈을 벌어 들였습니다.인천에 모여 든 여러 나라 무역상인들이 하룻밤을 묶고 한양으로 올라가야 했으므로 유명한 대불호텔이 들어서기도 합니다.
비류는 졸본부여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항해를 하던 중 크고 작은 섬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항구에 닿았습니다.
"닻을 내려라! 내 이곳을 둘러보리라."
문학산에 올라 출렁이는 바다와 작은 섬들, 그 섬들을 헤치고 계속 나아가면 앞으로 다가서는 중국 대륙을 바라보던 비류왕자는 소리쳤습니다.
"내 도읍지로 삼으리라. 이제부터는 미추홀이라 명하노라."
비류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인천은 몹시 분주해지면서 인천 역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문학산에서는 미추홀 성을 쌓느라 고함 소리가 오가며 축조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여러 부족들이 통합해 오면서 비류 백제는 나날이 커졌습니다. 한편으론 다른 부족국가들과 전쟁을 게속하며 영토를 차츰 늘려 나갔습니다.
물품을 가득 실은 교역선이 바삐 오가며 여러 소식과 지식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활발한 교역과 인구의 증가는 농업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한강을 낀 너른 평야를 가진 부평과남촌, 구월 일대에서는 많은 곡식을 생산해내어 비류 백제르 키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무렵 한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엄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졸본 부여왕의 딸 소서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왕모(소서노)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무장을 하고는 몇몇 군사를 거느리고 온조 백제의 위례성을 찾아갔던 소서노가 애통하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소서노는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웠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일으키는데 힘을 다했던 우리나라의 빛나는 영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영웅이 스러져 가는 이 때에 유다에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 유럽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예고하였습니다.
▶ 개항장 인천 - 100년전 인천
그 무렵 인천은 세계의 문호를 열어 개항이 되면서 밀려 들어오는 변화의 물결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천항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들이 가득 들어오고 산더미같이 쌓인 조선의 쌀리 수출되었습니다. 조선 도매상인 객주들은 신상협회를 만들어 일본사람들에 맞서 쌀과 콩따위의 곡물을 취급하기 위해 권업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동인천 일대에는 각 나라에게 조계지로 내주어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일자리를 찾아 움추린 몸으로 조개지를 기웃거리는 조선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농토를 잃고 개항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1897년 3월 22일, 우각리 지금의 창영동으로부터 도원고개로 가는 길목에서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게 철도 부설권을 따 낸 미국과 일본이 공사를 하는 통에 흰 도포를 입은 조선사람들은 구경 행렬에나 낄 뿐이었습니다.
답동 사거리 일대의 바다가 메워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거주지를 넓히느라 4000평에 달하는 매립 공사를 한창 벌이고 있습니다. 경동 싸리재 고개넘어에는 1897년에 준공된 답동 성당이 이국 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뱃길엔 독일 무역상 세창 양행이 운항하는 큰 증기 쾌속선이 오가며 많은 돈을 벌어 들였습니다.인천에 모여 든 여러 나라 무역상인들이 하룻밤을 묶고 한양으로 올라가야 했으므로 유명한 대불호텔이 들어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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