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의 名所] 침략역사 담긴 홍예문
작성자 : 이동열
작성일 : 2007.11.20 19:04
조회수 : 5,290
본문
침략역사 담긴 홍예문
자유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웃터골 오포산 기슭을 넘어가려면 「홍예문」을 지나야 한다. 홍예문은 강제개항 이후 일본이 각국 조계와 축현역, 만석동 일대를 잇기 위해 화강암을 높이 쌓아 통로를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든 뒤 붙여진 이름이다.
홍예문은 한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렸다. 홍예문(무지개문) 또는 홍여문(무지개돌문), 홍여문(虹轝門·무지개수레문) 등이 그 것이다. 하지만 모두 「무지개처럼 된 돌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 문을 「아나몽(穴門)」이라 부른 것에 비하면 돌문조차도 아름답게 바라보는 우리 선조들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홍예문은 모양새나 쓰임새 면에서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만든 배경엔 서글픈 일제 침략의 역사를 담고 있다. 홍예문은 1905년에 착공해 1908년 준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은 이 일대에 조계를 설정했다. 일본은 자기네 세력을 전동, 신생동, 신포동, 내동쪽으로 확대하는 한편 해안을 매립해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천 전체를 손에 넣기 위해 만석동 일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인들은 일본조계에서 만석동을 향하는 도로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당시 일본지계나 항구에서 만석동을 갈 때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해안선 지역을 거쳐 만석동으로 통행하기엔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해안선 도로신설은 너무 큰 공사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공사를 완공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버리고 홍예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흙일(土役)과 잡일은 기술없고 돈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사람들은 멀리 산둥(山東)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 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꾸리」라고 불린 이들은 홍예문 공사는 물론 개항 후 인천에서 벌어진 서구식 양관공사, 인천항 축조공사 등 큰 공사에 한국 노무자들과 함께 나섰다. 당시 홍예문 공사를 벌이던 일본은 땅속에서 암반이 계속 나오고 흙을 파내면서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파낸 흙을 실어 나르던 50여명의 인부들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홍예문 공사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다.
홍예문 공사가 어려움을 겪자 일인들은 불어나는 공사비를 우리나라에 떠넘기기도 했다. 총공사비 3만2천2백50원중 한국정부가 1만6천8백원을 부담하고 일본거류민단이 1만5천원, 일본 영사관의 후신인 인천이사청이 4백50원을 부담해 공사를 마쳤다.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홍예문은 인천인들에게도 편리함을 주었다. 홍예문은 내동 내리교회쪽에서 「약대이집」 고개를 넘어 청관 어귀까지 높은 길을 이어주는 산길의 육교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해 송월동에서 살고 있는 이종숙씨(82·여)는 『홍예문을 통과하는 바람이 시원해 무더운 여름철이면 이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기도 했다』며 『홍예문은 60년대 까지만 해도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 연인들이 곧잘 찾았다』고 전한다.
40여년 전만해도 홍예문의 난간은 쇠무늬(鐵紋)로 곱게 꾸며 안전사고 방지기능은 물론 전망대로서도 훌륭한 장소였다고 한다. 장홍목씨(80)는 『일제 당시 홍예문에서 남북을 바라보면 남쪽 왜시가지와 북촌 화수동 일대, 초라한 송현시가지가 대조를 이뤘다』며 『식민시대 청년들은 이를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에 젖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홍예문 주변 개발은 해방 후 10년 뒤인 195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인천세무서 뒷길을 차량이 다니도록 정비한 뒤 주변엔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자유공원에 우뚝 솟은 독일식 건물인 「인천각」과 홍예문 좌우로 들어선 「세창양행 관사」, 별장 주택 등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 영화무대 배경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홍예문에 얽힌 사연들도 많다. 인천석금(저자 고일)에 따르면 해방후 송건영이라는 청년이 영화에서 본대로 시험을 해보려고 우산을 쓴 채 이곳에서 뛰어내렸다. 송씨는 다행히 아무 상처 없이 무사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후 송씨를 흉내냈던 사람들은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또 일제시대 때부터 홍보용 간판을 붙이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부윤 나가이(永井)와 이께다(池田)가 여기에 자기 사진과 광고를 붙였다고 한다. 해방이후엔 국회부의장을 지낸 郭相勳(곽상훈)씨도 선거 때 홍예문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개항후 한세기기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홍예문은 예전과 다름없이 인천인들의 애환과 역사를 지켜보며 묵묵히 서 있다.
자유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웃터골 오포산 기슭을 넘어가려면 「홍예문」을 지나야 한다. 홍예문은 강제개항 이후 일본이 각국 조계와 축현역, 만석동 일대를 잇기 위해 화강암을 높이 쌓아 통로를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든 뒤 붙여진 이름이다.
홍예문은 한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렸다. 홍예문(무지개문) 또는 홍여문(무지개돌문), 홍여문(虹轝門·무지개수레문) 등이 그 것이다. 하지만 모두 「무지개처럼 된 돌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 문을 「아나몽(穴門)」이라 부른 것에 비하면 돌문조차도 아름답게 바라보는 우리 선조들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홍예문은 모양새나 쓰임새 면에서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만든 배경엔 서글픈 일제 침략의 역사를 담고 있다. 홍예문은 1905년에 착공해 1908년 준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은 이 일대에 조계를 설정했다. 일본은 자기네 세력을 전동, 신생동, 신포동, 내동쪽으로 확대하는 한편 해안을 매립해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천 전체를 손에 넣기 위해 만석동 일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인들은 일본조계에서 만석동을 향하는 도로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당시 일본지계나 항구에서 만석동을 갈 때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해안선 지역을 거쳐 만석동으로 통행하기엔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해안선 도로신설은 너무 큰 공사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공사를 완공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버리고 홍예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흙일(土役)과 잡일은 기술없고 돈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사람들은 멀리 산둥(山東)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 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꾸리」라고 불린 이들은 홍예문 공사는 물론 개항 후 인천에서 벌어진 서구식 양관공사, 인천항 축조공사 등 큰 공사에 한국 노무자들과 함께 나섰다. 당시 홍예문 공사를 벌이던 일본은 땅속에서 암반이 계속 나오고 흙을 파내면서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파낸 흙을 실어 나르던 50여명의 인부들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홍예문 공사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이다.
홍예문 공사가 어려움을 겪자 일인들은 불어나는 공사비를 우리나라에 떠넘기기도 했다. 총공사비 3만2천2백50원중 한국정부가 1만6천8백원을 부담하고 일본거류민단이 1만5천원, 일본 영사관의 후신인 인천이사청이 4백50원을 부담해 공사를 마쳤다.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홍예문은 인천인들에게도 편리함을 주었다. 홍예문은 내동 내리교회쪽에서 「약대이집」 고개를 넘어 청관 어귀까지 높은 길을 이어주는 산길의 육교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해 송월동에서 살고 있는 이종숙씨(82·여)는 『홍예문을 통과하는 바람이 시원해 무더운 여름철이면 이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기도 했다』며 『홍예문은 60년대 까지만 해도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 연인들이 곧잘 찾았다』고 전한다.
40여년 전만해도 홍예문의 난간은 쇠무늬(鐵紋)로 곱게 꾸며 안전사고 방지기능은 물론 전망대로서도 훌륭한 장소였다고 한다. 장홍목씨(80)는 『일제 당시 홍예문에서 남북을 바라보면 남쪽 왜시가지와 북촌 화수동 일대, 초라한 송현시가지가 대조를 이뤘다』며 『식민시대 청년들은 이를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에 젖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홍예문 주변 개발은 해방 후 10년 뒤인 195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인천세무서 뒷길을 차량이 다니도록 정비한 뒤 주변엔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자유공원에 우뚝 솟은 독일식 건물인 「인천각」과 홍예문 좌우로 들어선 「세창양행 관사」, 별장 주택 등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해 영화무대 배경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홍예문에 얽힌 사연들도 많다. 인천석금(저자 고일)에 따르면 해방후 송건영이라는 청년이 영화에서 본대로 시험을 해보려고 우산을 쓴 채 이곳에서 뛰어내렸다. 송씨는 다행히 아무 상처 없이 무사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후 송씨를 흉내냈던 사람들은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또 일제시대 때부터 홍보용 간판을 붙이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부윤 나가이(永井)와 이께다(池田)가 여기에 자기 사진과 광고를 붙였다고 한다. 해방이후엔 국회부의장을 지낸 郭相勳(곽상훈)씨도 선거 때 홍예문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개항후 한세기기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홍예문은 예전과 다름없이 인천인들의 애환과 역사를 지켜보며 묵묵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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