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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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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경인일보(19. 4.25)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학병 거부' 뭉친 청춘들, '호국의 넋' 되다
인천고 39회 졸업생이 직접 만든 졸업앨범과 사인지들. 오른쪽 하단은 송재필 선생의 인천고 재학중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재필 선생 유족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지역 명문고' 일본인 교장의 조선학생 차별에 단체조직… 몰래 졸업앨범 만들기도
1941년 졸업후에도 활동 동기생의 절반넘는 청년들이 '학생병 모집 반대' 운동나서
일제에 발각돼 송재필등 24명 구속 '참사' 혹독한 고문에 정태윤·김여수등 잇단 순국
풀려난 이들도 후유증 앓아 "명예회복 7명뿐" 자료 발굴통해 이제라도 '희생' 알려야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 1941년도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에서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같은 학교 동기생 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해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으며 졸업 후에도 이어져 왔다.
조선인 졸업생이 47명이었는데 일제에 발각돼 붙잡힌 이들이 24명이나 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많은 수가 그 후유증으로 옥에서, 또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비밀결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인천고 비밀결사 대원들은 일본의 학생병 모집에 대항하는 활동을 주로 벌였다.
그런데 대구나 평양에서 있었던 학병거부운동 관련 연구는 많지만 인천고 졸업생들의 학병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다.
인천고 비밀결사 활동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한 학교 동기동창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졸업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는 없었던 일"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의 활동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제의 학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6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송재필은 여름 방학을 맞아 충북 영동을 찾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송재필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던 안학순과 함께 일본의 강제 학병모집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결의문을 작성해 배포한 것이 적발된 것이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 결사 사건'의 시작이다.
경찰의 수사는 1년 넘게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인천 강화군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김여수 순국비. 강화군 온수리 출신인 김여수는 1945년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이 비밀결사 단체를 만든 것은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의 조선인 차별 때문이었다.
교장의 행동에 불만이 있던 학생들은 졸업앨범 제작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
1940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들은 조선인 동기생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이전에도 조선인 동기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었는데, 일본인 교사들도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모토 교장은 이를 반대했다.
비밀결사 대원으로 1941년 인천고 39회 졸업생이자 훗날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운성은 1974년 1월 발행된 인천고등학교 교지 '미추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졸업반이 되자 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 앨범 대(앨범 비용)를 국방헌금으로 바치라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은 한국 학생들의 교과 성적이 우수한데도 '수련'과 '교련' 차별을 받아 수석을 빼앗겼고, 매사 차별과 굴욕을 받아 부처산(현 재능대학교 일대)에서 한국 학생들만의 집회를 갖고 한국 학생이 나아가야 할 길 등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항일정신을 북돋았습니다. 또한, 앨범도 없이 헤어진다는 게 섭섭하고 서운해서 한국 학생들끼리만 앨범을 만들기로 하고 당시 송림동에 있는 한국인 경영 사진관에 부탁했습니다."
이듬해 3월 졸업한 이들 동기생들은 몰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몰라도 자주 모임을 하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
1940년대 초 당시 조선의 20대 청년들의 가장 큰 화두는 학병거부운동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1938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만 17세 이상으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칙령의 골자였다. 이 시기부터 최소 18만4천명이 일본군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인 청년들은 학병 지원을 거부했다. 일부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해 동지를 규합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입대하느니 옥살이를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
송재필이 학병 거부 운동을 독려하는 결의문을 배포한 것도 학병거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학생에게 전달한 결의문이 일제의 경찰에 적발됐고, 송재필과 동기생 24명이 경찰에 구속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감옥에 끌려간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과 함께 붙잡힌 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악명 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안 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태윤이 1944년 12월 가장 먼저 숨졌고, 이듬해 3월 가재연도 순국했다. 김여수, 고윤희 등도 그 뒤를 따랐다.
대부분은 해방을 맞기 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 경찰의 고문이 그만큼 악독했다.
송재필도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의 둘째 아들 송준호(66)씨는 "비나 눈이 오면 항상 몸이 좋지 않다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68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는데, 고문을 받았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또 먼저 간 동기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송준호씨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셨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인천에서 고위직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많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교(인천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에게는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죄책감 때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인천고 동문회에서는 인천고 39회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앨범을 보관하고 있다. 졸업앨범 안에는 그들의 '사인록'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본능은 무엇일까?', '선술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등 장난 섞인 글귀들이 적혀 있다. 20대 꿈 많던 청년이던 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인천고등학교 39회 졸업생을 기리는 추모비. 1985년 세워진 이 추모비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인천고등학교 45회 졸업생) 시인이 글을 남겼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여기 오랜 역사와 전통의 찬연한 빛이 머물고 이제는 미움도 싸움도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나가는 모교의 교정. 본교 39회 동창생 일동은 일제하의 재학시절부터 졸업 후에까지 민족적 자각으로 조직적인 항일애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일경(日警)에 24명이 체포, 투옥돼 4명이 옥사했고, 출감 후에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11명이 원통하게 호국의 넋이 됐다."
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동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인천고 동문 한상억 시인이 쓴 비문이다.
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6년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문당해 숨진 동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24명의 동지 가운데, 명예를 회복한 사람은 7명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 항일투쟁과 관련한 책을 써 온 인천고 출신의 이원규 작가는 "당시 인천고는 지역 명문 학교였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직장과 명문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 더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발행일 2019-04-25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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