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3/살아 있는 상징 '문학산'(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8. 9)
살아 있는 상징 '문학산'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3
2013년 08월 0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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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학산은 살아 있는 상징이다.
일찍이 고구려 왕자 비류가 이곳에 도읍해 지역사의 막을 연 역사의 현장이자, 조선 초 인천도호부가 설치됐던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백성들이 산성(산성)에 들어가 온 힘을 다해 왜적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승전지이다.
그 문학산을 예로부터 인천 사람들은 정상에 있던 봉화대가 마치 사람의 '배꼽' 같다고 해서 '배꼽산'이라 불러왔다.
이는 문학산이 지니고 있는 '모성애적' 의미를 잘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풍수지리의 대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문학산은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한다"는 의미심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인천이 한반도의 중심, 동북아의 허브임을 말해 주는 것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과 함께 우리 고장이 예사롭지 않은 땅임을 말해준다.
향후 동북아를 이끌고 갈 인천국제공항, 인천항, 인천경제자유구역(트라이포트)이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닌 역사적 소명임을 생각하게 한다.
1 1960년대에 촬영한 문학산의 수려한 자태
문학산은 '금강'과 같이 깎아지른 기암괴석은 없으나 묵직하고 순연한 자세로 대대손손 인천을 감싸안은, 인천의 명실상부한 진산(鎭山)이다.
청학동 쪽에서 바라본 장관이다.
2 문학산의 '배꼽'
문학산 정상에 있던 봉화대의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배꼽'과 같다고 해서 문학산을 '배꼽산'이라 불러왔다.
혈연적 인연의 흔적이 '배꼽'이라면 인천 사람들은 예로부터 '문학산'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게 아니었을까?
3 문학산 산성(山城)
문학산에 성(城)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인천 백성들은 산성에 들어가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해 왜적을 물리쳤다.
이런 사실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4 인천시 기념물 제1호
인천시는 문학산 산성을 시 지정 기념물 제1호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산성은 일부만 남아 있고, 서예가 검여 유희강 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던 '문학산성 동문(東門)' 등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무너져 내린 산성의 모습이다.
5 인천의 본향(本鄕) 관교동
인천부 백성들은 전쟁 중에도 부사(府使)를 비롯한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왜적을 물리치는 데 최선봉에 섰다.
옛 선조들의 정신적 보금자리였던 문학산을 기리고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문학산성 동문 부근 전경
임진왜란 당시 격전장이었을 문학산성 동문 부근 모습이다.
그 옛날 인천 백성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듯 싶다.
아직 검여 선생이 '문학산성 동문'이라는 글씨를 새겨 적기 전 흔치 않는 사진이다.
/조우성(주필)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화도진도서관, 사진작가 이종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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