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3/해안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8. 9)
인천의 '워터프론트 거리' 해안동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3
|
▲ 인천아트플랫폼. 해안동의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창고 몇 동이 남아있다가 몇년 전 아트플랫폼으로 재탄생됐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중구 해안동도 중앙동과 송학동처럼 개항 이전 인천부(仁川府)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의 일부였다.
어려서 들은 원로들의 말을 기억해 보면, 지금의 해안동 태반은 붉은 나문재가 뒤덮인 갯벌과 갈대숲이었다고 한다.
뭍은 조선 말기에 체결한 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의해 부근 동네들과 함께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각국지계에 속했다.
1883년 개항 이후 조선 조정은 열강의 요구를 이기지 못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지계를 설정했다.
인천에는 청국 지계, 일본 조계와 함께 서구열강의 공동조계인 각국지계가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 항구 주변을 매립해 해안동 지역이 오늘처럼 확대됐다.
일제는 강제합병 후인 1912년 옛 선창리 지역을 분리하면서 이곳에 해안정(海岸町)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붙였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지명의 기원이다.
자연적·지리적 의미에 '마치(町)'라는 일본식 지명단위 이름을 붙였을 뿐이어서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초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큰 문제 없이 해안동으로 됐다.
일제때 동네를 세분화하면서 1정목~4정목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1,2,3,4가로 됐다.
그러므로 해안동이라는 지명은 버려야 할 일제시대의 잔재로 볼 수 없다.
해안동은 이름 없던 해안지역, 그리고 매립지였다.
그래서 전래된 우리말 지명이 없다.
1910년 강제합병 직후부터 일제는 토지에 대한 완벽한 통계와 농업정책의 기반을 구축해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한반도 전체를 근대적 삼각측량으로 조사하고 지적을 완성하며, 지도에 모든 지명을 한자로 기입했다.
그래서 우리말 재래 지명은 많이 사라졌다.
1961년 정부는 우리말 지명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관보에 공시함으로써 되살려냈다.
인천에도 대부분 지역의 재래지명이 되살아났으나 해안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
지금은 자유공원이 된 각국조계의 응봉산 중턱이나 기슭 등 조금 높은 지역은 외국인 회사 사장의 저택이, 매립지로서 낮은 지역인 해안동에는 운수회사나 창고 공장이 지어졌다.
해안동에는 최고의 선물 투기장이었던 미두취인소가 3가 1번지에, 홈링거양행이 1가 7~9번지에, 광창양행(廣昌洋行. Bennett 商社)가 4가 1번지 지금의 신포공영주차장 자리에, 그리고 일본우선(郵船) 사옥이 1가 9번지에 있었다.
항만으로 가는 길도 뚫렸다.
그것이 지금의 제물량로이다.
매립지였으므로 계획도시가 이뤄져 이 길은 인천의 다른 곳과 달리 직선으로 만들어졌다.
일제가 매립해 만든 대로를 타고 6·25전쟁 직후 항구에서 하역된 전쟁 물자들이 트럭에 실려 이 길을 지나 신흥동의 보급창으로 가거나 서울 용산으로 갔다.
아침이면 하역 노동자들이 미군수송선 LSD에 올라 일하기 위해 이 길을 걸어 부두로 갔다.
열 살 무렵 미군부대 경비주임이던 외숙과 함께 이 거리에 서서 부두로 행진하는 하역 노동자들을 구경한 기억을 살려 뒷날 중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60년 반공궐기대회 같은 관제행사에 중·고교생들을 동원하고 식이 끝난 뒤에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대개는 해안동 대로를 걸어 하인천역까지 행진하고 해산했다.
그때만 해도 해안동 큰 길가에는 무수히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창고도 많았지만 조양상선 건물 등 멋들어진 건축물들도 서 있었다.
50년이 흐르는 사이에 대부분 헐려나가고 창고 몇 동이 남아 있다가 최근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재탄생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일본 요코하마의 아카렌카 창고의 재활용이 부러웠는데, 기념품점들이 들어 있는 거기보다 문화예술 시설로 재탄생한 인천이 자랑스럽다.
1966년 9월 28일 9·28 서울 수복 기념 국제마라톤대회가 해안동 로타리에서 열렸다.
한국전 참전자이며 1960년의 런던 올림픽, 1964년의 도쿄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도 참가해 이 길을 달렸다.
지금의 제물량로 어딘가에서 아베베에게 박수를 친 기억이 생생하다.
인천 다운타운의 거리가 대개 그렇듯이 해안동도 영욕으로 가득한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2013년 08월 09일 (금)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