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고(2)/송학동(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8. 2)
개항기 최고 주택가였던 송학동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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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송학동도 중앙동처럼 개항 이전 인천부(仁川府)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의 일부였다.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장송 우거진 구릉이었다가 개항과 더불어 떠올랐던 지역이다.
조선 말기에 체결한 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의해 부근 동네들과 함께 각국지계에 속했다.
일제는 강제합병 후인 1912년 옛 선창리 지역을 분리하면서, 이곳을 산수정(山手町. 야마테마치)이라는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었다.
일본어에서 산수(山手. 야먀노테)는 높은 지대를 뜻하는 단어로, 저지대를 뜻하는 시타마치(下町)와 대비된 뜻으로 쓰인다.
지명으로는 요코하마(橫浜)와 나가사키(長崎)에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경성 용산의 산천동, 부산 영도의 신선동 등 여러 도시에서 같은 식으로 지어졌다.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초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송학동(松鶴洞)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다.
일제때 동리를 세분화하면서 1정목~3정목으로 나누었는데 그게 그대로 1,2,3가로 됐다.
학이 날아와 앉는 소나무에 관한 지명 유래에는 구전된 게 없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신용석 선생은 선친 신태범 박사께서 '응봉산(鷹峰山)을 끼고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나무와 학을 넣어 만들자'고 지명위원회에서 제의했다고 회고한다. (신용석의 지구촌 '되찾은 송학동 이름'-인천일보 2013. 5. 30)
송학동은 만국공원(자유공원) 기슭에 있어서 주변에 제물포 최고의 저택과 외국인 상사(商社) 건물들이 자리잡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가 1번지 맥아더 동상 자리에 있던 한국 최초의 서양인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 사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으로, 향토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이경성 선생에 의해 인천박물관으로 꾸려졌으나 아깝게도 인천상륙작전 포화로 붕괴됐다.
독일인 무역상이 살던 집이 폭격으로 사라지고 폭격 지휘자였던 미군 장군의 동상이 섰으니 인천 근현대사의 한 상징이라 할 만하다.
구한말 서양인들이 와인을 마시며 실내악단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던 제물포구락부는 행정구역상 중앙동에 속하지만 송학동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홍예문의 모습.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송학동 2가 20번지에는 인천시 유형문화재인 홍예문이 있다.
일제가 응봉산 자락을 잘라 1908년 축조한 것인데, 군 공병대가 만든 것 치고는 외양이 아름답고 토목공법도상 가치도 크다고 한다.
홍예문이 있는 응봉산 구릉을 특별히 '약대이산'이라 불렀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연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 남득시 南得時) 박사를 존경해서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한다.
1892년 3가 3번지에는 성공회 회당이 들어섰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밋밋한 불모의 언덕에 작은 단층 건물이 서 있다.
이것을 서양인들은 '세인트 미카엘 처치', 인천 사람들은 '영국교회'라고 불렀다.
이 유서 깊은 회당도 6·25 전쟁 때 소실됐다.
서양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각국지계에는 그들의 의사 결정과 행정·치안업무를 관장하는 공서(公署)가 필요했다.
현재의 인성여고 자리에 붉은 벽돌 2층 건물 두 채를 지었는데, 1923년 일제가 그 자리에 2층 짜리 공회당을 신축하면서 헐어버렸다.
공회당에서는 음악회와 강연회가 활발히 열렸던 것 같다.
1924년 4월 사회주의 논객으로 명성을 떨치던 죽산 조봉암이 뒷날 아내가 된 여성 사회운동가 김조이양과 함께 이곳에서 명강연으로 인천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500석 좌석이 가득 찼고 얼마나 인상적인 강연이었는지 그것이 뒷날 인천에서 정치적 기반을 잡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33년 11월에는 현제명의 독창회가 열렸다고 기록이 전한다.
공회당 주변에 무술도장인 무덕관, 인천경찰서, 인천세무서 등도 신축됐다.
무덕관은 1950년대 중반에 헐리고 시민관이 들어섰다.
1950년대 말 남부출장소 부소장을 하던 아버님을 뵈러 가서 함께 영화구경을 한 기억이 난다.
송학동 언덕에 서 보면 영욕과 역동이 넘쳤던 인천의 근현대사가 생생하게 살아오고, 사라진 건물과 변화된 골목들이 아쉽게 느껴진다.
인천은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2013년 08월 02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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