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11/내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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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0.11)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11
중국인 묘지서 조선인 거류지로
1930년대 인천의 중심 된 '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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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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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내동도 인접 마을들처럼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필자의 선친은 <인천지명고>(1993)에서 개항 전 '안골말'과 '의장지말'이 있었다고 쓰셨다.
안골말은 옛 감리서가 있던 마을이다. 내리(內里)라는 한자말을 함께 썼고 의장지말은 의장지(義葬地)가 있던 마을이라는 설명을 붙이셨다.
안골말은 첫 자연취락이었다.
싸리재가 시작되는 지금의 경동사거리 아래부터, 옛 감리서가 있었던 현재의 내동 83-5번지 스카이타워아파트 부근까지 개항 이전 이미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이 안골, 즉 내리(내동)의 근원인 것이다.
의장지란 공동묘지를 일컫는 중국어 단어이다.
지금 차이나타운이라 부르는 옛 청관에 몰려와 살던 중국인이 지금의 내동 6번지 일대를 자기들 묘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동인천역에서 홍예문을 향해 자유공원로를 타고 전동소방서까지 절반쯤 걸어 올라가면 왼쪽에 홍익직업능력개발원이 보이는데, 그곳이 중국인 묘지가 있었던 6번지이다.
인천 인구가 팽창하면서 묘지는 사라지고 새로운 취락이 자리를 잡았으나 계속 의장지라 불렀다.
그 내막을 알게 하는 자료들이 있다.
1896년 1월 인천부 관찰사 박세환이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올린 보고에 '1884~1885년 두 해에 청국과 일본 상인들이 확충한 조계, 각국조계와 의장지를 잘라 정했는데'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1936년 5월12일과 18일자 동아일보는 '내리의 속칭 의장지는 구한말 중국 거류민들이 공동묘지로 무상임대를 받아 사용해 왔고 그 후 채소밭이 되었다.
1920년 경 주택지로 바뀌었다.
지금은 인천의 중심지가 됐는데, 중국인들이 거주민 동의 없이 매각해 분쟁이 발생한 것'을 기사로 쓰고 있다.
1885년 경 외국인들의 임차지인 지계를 확충하면서 중국인들이 쓸 묘지를 무상임대로 잘라주었고, 그 후 묘지는 채소밭으로 됐다가 조선인 거류지로 바뀌었고 1930년대 중반 인천의 중심지로 됐다는 것이다.
구한말인 1907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는 전동·외동·내동·용동·신창동·선화동·화개동·호정동으로 분할됐다.
지난 번 경동 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합방 후인 1912년 일제는 내리와 외동 사이에 경정(京町)이라는 지명을 끼워 넣었다.
1914년에는 다시 외리와 내동으로 환원했다가 내동을 1939년 서경정(西京町·니시쿄마치)이라는 일본식 정명으로 고쳐 버렸다.
서울로 가는 자기들 중심의 경정 거리 서쪽에 위치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1일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로 바꿀 때 이곳은 100년 전 전통적 취락명인 내동으로 환원됐다.
그 후 행정 편의를 위해 경동을 합쳐 내경동이라 했다가 다시 인현동까지 합해 동인천동이라는 행정동으로 만들었다.
내리(내동)는 영욕이 넘쳤던 인천근대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인천감리서가 여기 자리를 잡았었다는 것이다.
감리서는 개항장에서의 통상과 외국인 입출국, 개항장의 내외국인을 통치하는 기구였다.
인천감리서는 개항하던 1883년 문을 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인 스치다(土田)를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갇혔다가 탈옥한 곳, 다시 안악사건으로 다시 끌려와 갇혔던 곳이 감리서 옆 감옥이었다.
둘째는 오늘날 중구 지역 거리들이 대부분 청국지계, 일본지계, 각국지계 등으로 지정돼 성장한 데 비해 내리는 조선인 중심 동네로 명맥을 이어 왔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과 6·25전쟁 이후에도 부자 동네로 남아 있었다.
셋째는 외래 종교의 중심으로 됐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신문을 보면 내리교회의 청년회 활동, 성공회 산하 성미가엘병원의 빈민구제에 관한 사항이 아주 많다.
18세기 동양, 중남미, 아프리카에서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희생적이며 선량한 선교 이후 침탈의 발판으로 되고 민족공동체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내리의 두 종교회당은 위안과 치유의 사랑을 실천했고, 그것은 인천역사의 소중한 일부로 됐다.
두 회당은 지금도 지나간 세월을 증언하며 서 있다.
2013년 10월 1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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