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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8/국내 최초·유일했던 각국 공동조계(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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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9.12)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8
국내 최초·유일했던 각국 공동조계
약소국 윽박질러 침탈 '작은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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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租界)란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롭게 살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을 말한다.
사전적 해석은 그렇지만, 실상은 힘센 나라가 약소국을 윽박질러 차지한 '작은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한·중·일 3국 중 조선은 개항이 가장 늦은 나라였고, 조선의 개항장에 조계를 설치한 여러 나라는 이미 다른 나라에 조계를 설치했었거나 자국 내에 다른 나라의 조계 운용을 경험한 나라들이었다.
맨 먼저 인천에 조계를 설치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1883년 9월30일 일본은 '인천구일본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에 조인해 7000여 평의 전관 거류지를 차지했고, 청국도 1884년 2월2일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으로 일본 거류지 서쪽 5000여평의 조계를 장악했다.
그에 대해 인천 주재 외국인들도 조선 진출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 정부와 '각국공동조계장정(各國共同租界章程)'을 1884년 10월4일 체결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각국조계(현 자유공원 일대)'로 총 14만평에 달하는 규모였다.
각국조계는 명목상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에서 운영을 담당했다.
땅은 제 나라 것이었지만, 그 운영은 지금의 인천시장 격인 '인천항 감리'와 조계 내에 자국민이 있는 조약 체결국인 미국, 영국, 독일, 청국, 일본의 영사와 선출 지주 3명 등 9명이 담당했다.
'신동공사'는 조선 내 '작은 정부'와 같아서 각종 규칙 제정과 벌금 부과 권한을 가졌으며 도로 개설, 가로등 설치, 건물의 자재 사용 제한(벽돌, 석재, 철재 사용) 등 모든 결정권을 행사했다.
인천의 개항장은 그로부터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각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로 변해 갔고, 싫든 좋든 그들에 의해 뿌려졌던 '근대화의 씨앗'은 전국 각지로 홑씨처럼 퍼져나갔던 것이다.
각국조계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 운명을 달리했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후 개항장 일대의 조계를 모두 없애려 했으나 토지 등기 문제 등 뒤처리가 늦어져 1913년 4월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각국공동조계를 폐지했다.
그해 11월 청국 조계도 폐쇄됐다.
1 조선 인천 제물포 각국조계 지도
제물포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각국조계 분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지도이다.
오른쪽 하단이 일본 조계, 왼쪽 구릉지대가 청국 조계이며 지금의 응봉산 자유공원 아래 지역이 각국조계이다.
그들은 조계 안에 신동공사와 제물포구락부를 두어 서로의 이해를 조정했다.
2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
대불호텔은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1884년 4월 이미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 군함 주니아타 호의 군의관 조지 우드의 일기에 의해 밝혀졌다.
오른쪽이 아펜젤러 목사가 묵었던 2층짜리 일본식 건물이다.
'호텔 다이브츠, 플랫쉬 브레드 엔드 미트'라고 쓰인 영문 간판이 이채롭다.
3 일본 조계의 거리 풍경
1889년 이후 촬영된 인천 일본 조계의 거리 풍경이다.
사진 왼쪽의 3층 벽돌집이 1889년에 신축한 '대불호텔'이고, 거리 한가운데 끝 청국 조계 경계에 서 있는 것이 스튜어드 호텔이다.
일본의 소도시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4 초기 청국 조계 풍경
1884년 4월 청국은 조선 정부와 조계 장정을 맺고 지금의 중구 북성동 일대를 조계지로 차지했다.
청국은 조계지 내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고, 화상(華商)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신축 전 청국영사관에 여의주와 용이 그려진 '청국기'가 게양돼 있다.
1910년 11월 철폐된 후, 이 지역은 '청관(淸館)'이라고 불렸다.
5 청·일 조계 경계 언덕길
조계를 처음 차지한 나라는 일본이고, 그 다음이 청국이었다.
일본 조계는 지금의 중구 관동ㆍ중앙동 일대였고, 청국 조계는 북성동 일대였다.
언덕길이 두 조계지 경계에 해당하는 곳으로 초기에는 오늘과 같은 국적불명의 석등(石燈)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6 각국조계 표지석
1884년 11월 7일, 조선 정부는 제물포 각국공동조계장정에 조인했다.
각국조계는 명목상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에서 운영했지만, 조선 내의 '작은 정부'와 같아서 각종 결정권을 행사했다.
각국조계는 일본과 청국 조계의 배후를 감싸듯 에워싼 지역으로 지금의 자유공원 일원이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하퍼즈 위클리, 런던뉴스 화보, 르 몽드 일뤼스트레, 이원규 소설가, 필자.
2013년 09월 1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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