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7/남의 손에 떠밀려 문 연 제물포(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9. 6)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7
남의 손에 떠밀려 문 연 제물포
얼결에 근대자본주의 변방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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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 체결 후, 조선 정부는 일본이 강요한 3포 개항(三浦開港)에 대해 전전긍긍했다.
부산포와 원산포에 비해 도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물포를 개항하는 것에는 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익현 지사는 이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도끼 상소'를 감행했다.
"제물포는 도성의 인후(咽喉)라, 제물포를 내 주는 것은 곧 나라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사오니 부디 통촉하옵소서."
당시 정세를 황제도 모를 리 없었건만, 나라는 이미 기울어 손을 쓸 여력이 없는 터였다.
제물포 개항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전 작업은 전적으로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 나라의 문을 열면서 내 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간여하지 못했던 굴욕적인 개항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제물포 개항에 대한 정식 포고는 일본 정부의 관보에 기록되고 있다.
"1883년 1월 1일부로 조선 제물포를 개항하니 상민들은 해지에 가서 장사를 해도 좋다"는 요지의 포고가 그 같은 어처구니없는 정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할진대 인천 지역의 몇몇 인사들이 "인천 개항 130주년을 축하한다"는 망발을 뇌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무엇을 경축한다는 말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는 시각도 포기할 수 없다.
제물포 개항은 개화의 의지를 외세에 의해 철저히 꺾인 굴욕적인 역사 전개였지만, 싫든 좋든 근대자본주의 변방에 편입된 사건이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학리(현 남구 문학동)의 도호부를 폐지하고, 내리(현 중구 내동)에 감리서를 설치한 것이 개항에 대한 국가적 조치의 거의 전부였다.
향후 조선은 전대미문의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갔다.
1 소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바닷길을 밝힌 곳은 인천이다.
개항에 따라 정부는 1902년 해관 등대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 이를 각각 완공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2003년 국가해양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 개항 초기의 제물포 포구
개항 직후 촬영된 인천 제물포의 모습이다.
인천도호부가 폐지되고, 이곳에 개항장 업무를 맡아볼 인천감리서가 설치됐지만, 아직 부두 시설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해안가에 올망졸망 초가가 이어져 있고, 어선 몇 척이 눈에 들어온다.
3 개항 초기의 부두 전경
부두 축조 공사는 개항 7년 후인 1890년 무렵에 비로소 시작됐다.
월미도 맞은편 해안에 돌로 쌓아놓은 제방이 선착장을 겸한 부두 시설의 전부였다.
한복을 입은 어부들이 오가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게 보인다.
4 초가가 즐비했던 마을 풍경
19세기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입체사진 '스테레오 뷰'에 실린 제물포 한국인 마을의 모습이다.
초가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마을사람들과 갓과 한복을 차려입은 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특정할 지형지물이 없어 현재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다.
5 제물포 부두에 들어찬 어선들
제물포 부두 전경이다.
밀물 때 맞춰 들어온 어선들이 늘어서 있다.
한복을 입은 수많은 남자와 몇몇 서양식 모자를 쓴 정장차림, 엿 파는 아이들이 어우러져 활기찬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6 조계지와 한국인 마을
한국인 마을의 초가와 외국인이 모여들기 시작한 조계지의 서양식 건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의 자유공원이 자리 잡은 응봉산 기슭에 아직 건물이 드문드문 세워진 전경이다.
산 정상의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던 '세창양행' 사택이다.
7 행정·사법 업무를 맡았던 인천감리서
개항장 관련 공적 업무를 맡아보던 인천감리서의 전경이다.
개항되던 해인 1883년 8월 19일 정부는 문학리 관교동 소재 인천도호부를 폐지하고 지금의 중구 내동에 1883년 8월 19일 인천감리서를 설치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지방제도가 폐지되면서 감리서도 문을 닫았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한국과 그 이웃나라' 전재, 인천 명소 사진엽서, 스테레오 뷰(언더우드 사 제작), 샤를르 바라 세계여행기 전재, 필자.
2013년 09월 0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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