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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6/일본의 한반도 침략 '간특한 계략'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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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8.30)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6
일본의 한반도 침략 '간특한 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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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雲揚號 事件)=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이어 인천에서는 소위 '운양호 사건'을 겪었다. 1875년 을해년 9월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해 포격을 가하고, 이어 영종진에 상륙해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것을 일컫는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에 파견돼 있던 교섭관 모리야마(森山茂)가 한반도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 정부에 건의한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를 받아들여 저들이 군함을 파견한 배경을 갖고 있다.
운요호와 제2 정묘호는 그해 5월25일, 6월12일 두 차례 부산에 입항해 무력시위를 벌였고, 6월14일에는 불시에 발포연습까지 했다.
그 후 운요호(함장 이노우에 가오루)는 9월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에 정박해 초지진에 침입했다.
이때 조선 수병들은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일본군은 운요호로 철수해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어 영종진에 상륙해 격전을 벌였는데, 낙후된 무기로 싸웠던 첨사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여명의 조선군은 패주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 불을 지르고 대포 10여문을 비롯해 수많은 군물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 후 나가사키로 돌아갔는데, 당시 약탈을 당한 영종진의 대포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돼 있으나 아직 반환 요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신미년과 병인년의 국지전을 '양요(洋擾)'라 지칭하는 데 비해 1875년 일본군의 만행은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썼던 그대로 '사건(事件)'이라 일컫고 있다.
이는 을해년에 일어난 '왜요(倭擾)'이므로, '을해왜요'라 개칭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일본은 만행에 이어 적반하장으로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영해의 자유 항행과 개항 등을 요구했고, 결국 조선 정부는 이에 굴복해 1876년 2월 27일 강화 연무영에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는 강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한반도 침략의 간특한 계략이었으며,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첫 단계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조선은 35년간 참담한 암흑기를 맞아야 했다.
1 운요호
일본은 1875년 9월 운요호를 인천에 몰고 왔다.
초지진에 접근해 포격을 유도했고, 이를 구실로 영종진에 상륙해 35명의 군민을 살상하고 대포 10여 문과 군물 등을 약탈해 갔다.
이를 기화로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운요호 모습은 현재까지 이 그림만 전해지고 있다.
2 영종진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군(위)
'운요호 사건'의 전투 장면 사진은 일체 전해지지 않고, 이와 같이 후대에 목판화로 만든 상상화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나마 영종진의 성벽이라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이것밖에 발견된 게 없다.
3 조일수호조규 체결 장면
운요호 사건을 기화로 일본은 1876년 2월26일 조선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일명 강화도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에 이르게 됐다.
일본은 청의 종주권을 물리침으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했다.
조선의 신헌과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마주앉은 모습과 장소가 연무당임을 알 수 있는 현판이 달려 있다.
강화부 연무당에서의 체결 모습을 그린 일본 측의 상상도이다.
4 조약을 체결한 연무당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인이 촬영한 강화부 읍내의 원경이다.
관사인 연무당이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사진만으로는 내부의 규모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 일본군은 연무당 앞에 포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5 조일수호조규 본문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문이다.
조선 측 대표 신헌의 이름이 보인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은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지만 후에 거짓임이 드러났다.
6 강화남문 앞의 주민들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인 사진사 '가와다 가이치'가 찍은 강화 풍경 사진이다.
강화부 남문 앞에 흰 한복을 차려 입은 주민들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가 촬영한 사진들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도 소장돼 있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눈빛출판사, 일본 잡지 '1억인의 소화사', 필자
2013년 08월 3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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