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6/관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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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8.30)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6
관청과 일본인 거류지 중심 관동
우리 역사로서 소중한 가치 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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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인천부청사로 쓰였던 중구청 건물. /인천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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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은 현재의 중구청 앞거리이다.
1883년 개항 이전 갈대 우거진 해변과 갯벌로 고유지명이 없었으며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개항과 동시에 지금의 중앙동과 함께 인천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원인천(관교동)에 있던 부내면 명칭을 해안가로 가져가면서 주변 마을들과 함께 인천부 부내면 소속으로 됐다.
1883년 9월 인천일본지계조약에 의해 일본지계에 들어갔다.
일본지계는 현재의 항동과 관동, 중앙동 일부를 합해 약 7000평이었다.
1908년 매립공사를 하면서 확장됐고 일본영사관을 비롯한 식민통치를 위한 관청들이 들어섰다.
한일 강제합병 후인 1912년 일제는 거류지 구역을 폐지하고 부내면에 새로운 정명(町名)을 만들 때 중정(仲町·나가초)이라 고쳤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정1~3정목으로 바꾸었다.
인천의 일본식 지명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을 갖고 명명됐다.
가장 고약한 일이 소화정(부평동) 같은 일본 왕실의 왕이름을 따는 것이고, 둘째로 고약한 일이 화방정(북성동)처럼 한일 강제합병의 공신들 이름을 따는 것, 셋째는 본정(중앙동)처럼 일본의 지명을 그대로 따는 것 등이었다.
중정은 세 번째에 속한다.
부산·마산·광주·목포·원산 등 도시에 같은 마을 이름이 붙었다.
개항과 동시에 인천은 일본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조우성 주필의 인천일보 연재 '미추홀'에 의하면 당시 일본 땅에는 조선의 인천에만 가면 살 방도가 있다는 풍문이 돌아 후쿠오카(福岡), 구마모토(雄本), 오사카(大阪) 등지에서 인천으로 인천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만2000명이나 돼 일본지계를 넓혀나갔다.
인천은 도시 기반시설이 집중되는 근대화된 일본인 주거지역과 혜택에서 소외된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양분됐으며 행정과 일본인 거주지 본정(현재의 중앙동)과 중정이었다.
개항 당시 해안지역은 갈대 무성한 구릉과 벌판이었고 민가가 적었으니 마음대로 도시계획을 했고 그 중심은 본정(현재의 중앙동)과 중정이었다.
1946년 1월 미군정 당시 왜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지금처럼 관동으로 고쳤는데, 그 이유는 인천부청 등 행정관청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1, 2, 3정목이라 한 것은 1, 2, 3가로 고쳤다.
1977년 관동은 중앙동에 통합됐고, 1998년 중앙동이 신포동에 통합됐다.
그러므로 중앙동과 관동은 신포동 주민센터에서 관할한다.
관동의 상징적 건축물은 지금 중구 청사로 쓰고 있는 옛 인천부 청사이다.
일본은 개항 당시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사무실을 열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인 1902년 그 자리에 영사관을 2층으로 신축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그 건물은 잠시 이사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10년 강제합병 후 인천부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 건물은 일제강점기 내내 인천을 통치하는 본부 구실을 했으며 8·15 광복 후 인천부 청사로 그대로 사용됐다.
미군정의 결정으로 잠시 제물포시 청사로 바뀌었다가 인천시 청사로 됐다.
3층으로 증축하고 별관들을 지어 사용하다가 1985년 남동구 구월동으로 새 청사를 신축해 이전하고 중구가 물려받아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관동에는 무단통치 기구인 헌병분유소(分留所)도 있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지방의 헌병조직은 큰 도시에 헌병분대, 작은 지역에는 헌병분견대를 두었다.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의 3·1만세 시위 때 경찰과 함께 탄압에 나선 것도 이 헌병분유소였다.
필자 같은 인천 토박이들은 인천 개항장 지구에서 유서 깊은 건물들이 언제 헐렸는 지 모르게 사라진 것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뒤늦게나마 인천시는 관동의 옛 일본인 거류지역을 포함한 옛 다운타운을 개항장 문화지구로 지정했고, 문화예술 시설과 관광 편의시설을 잘 배치해 서울의 인사동과 대학로처럼 만들려는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몇 해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거리에 비해 중구청 앞거리 일대는 도시재생사업을 잘 추진해 꽤 볼 만해졌다.
인천 관동과 중앙동 같이 근대문화 유산을 가진 곳이 이 나라에 없다.
비록 일본인들의 통치 중심지였지만 우리 역사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정성을 들여 복원하고 잘 가꿔 나갔으면 좋겠다.
2013년 08월 3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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