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소설가 이원규(65회)의 인천지명考-5/항동(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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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87.23)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考-5
제물포, 미나토마치, 그리고 항동
개항과 더불어 일자리 많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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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의 제물포항 /사진제공=인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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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항동은 개항 이전 지금 파라다이스호텔이 있는 해망대산(海望臺山)을 빼고는 조수가 드나드는 갯벌이었다.
1908년 매립공사를 하면서 육지로 바뀌어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됐으나 서구 열강들이 권익을 인정하는 각국지계에 속했다.
한일 강제합병 후 1914년 일본은 우리나라 지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면서 이곳을 항정(港町)이라 했다.
인천 외에도 평양, 진남포, 장항, 마산, 목포 등 수많은 곳에서 바다나 강 쪽 마을에 이 지명을 붙였다.
원인천(관교동)에 있던 부내면 명칭을 해안가로 가져가면서 항동은 주변 마을들과 함께 인천부 부내면 소속으로 됐다.
항정의 일본어 발음은 '미나토마치'다.
일본을 여러 번 여행한 사람이라면 이 지명을 많은 지역에서 보았을 것이다.
오사카(大阪)와 요코하마(橫浜)에 있으며, 나가사키(長崎), 히로시마(廣島), 門司(모지) 등지에 같은 지명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끌어다 쓴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마을 이름으로서 고유명사도 있지만 '항구'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계 일본인 엔카 가수 고(故)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1938~1989)의 노래 '미나토마치 쥬삼반치(港町 13番地)'도 가사를 음미해 보면 마을 이름이 아니라 항구지역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아쉬운 것은 1946년 미군정 당시 왜식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되돌릴 때 그냥 '항동'으로 명명했다는 점이다.
항구에 인접한 마을이니 그냥 항동으로 하자고 한 것이겠지만 조금만 더 숙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제물포동' 혹은 '해망대동'로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물포(濟物浦) 포구는 정확히 어디인가. 필자 선친을 비롯한 인천의 1세대 향토사 연구가들은 고심했다.
개항 시기 인천항의 중심이 지금의 항동과 북성동 해안임은 분명한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성창포와 제물포는 같은 곳인가, 다르다면 각각 어디인가 짚어내게 하는 분명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물포는 지난 번 글에서 말한 북성포구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한 포구였다.
응봉산에 작은 성곽이 있었고, 그 앞이 성창포였으며 성곽 북쪽 아래 또 다른 포구가 있어 북성포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천역 뒤보다 더 남쪽, 파라다이스호텔 아래였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
제물량(濟物梁)은 뜻이 사뭇 깊다.
김윤식 시인은 제물은 '물을 다스린다'라는 뜻도 있지만 '물을 건너다' 라는 의미에 중심을 두어 설명했다.
그러면 '량(梁)'은 무슨 뜻인가. 포구가 아니라 육지 사이 혹은,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 해협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디 우리말로는 '돌' 또는 '도'라고 부르다 한자로 차자한 것이었다.
남해안의 울돌(鳴梁명량), 노돌(露梁노량)이 그 자취가 남은 지명들이고 그밖에 서울의 노량진(鷺梁津), 통영의 사량(蛇粱), 견내량(見乃梁) , 칠천량(漆川梁), 경기도의 안흥량(安興梁), 화성시의 화량(花梁) 등이 그렇다. 제물량은 육지와 월미도 혹은 영종도 사이에 놓인 해협이어서 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부 향토사가들의 해석에 오류가 보이는데, 여기서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제물량은 인천 앞바다, 제물포는 제물량 바다에 있는 포구, 제물진은 제물량을 지킨 수군기지를 뜻한다.
개항 이전 조선과의 통상을 강요하며 나타난 군함들이 가진 지도에 인천항이 '제물포'라고 적혔고, 그것이 인천 전체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제물량, 제물포 일대는 내국인들에게 원인천인 관교동 일대와 구분하여 '제물' 또는 '제밀'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필자가 유년시절에 자란 서곶은 부평으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고희가 넘는 할아버지들, 그러니까 1880~90년대 출생하신 분들이 인천으로 장을 보러 가실 때 '제밀에 장보러 간다'고 했다.
이곳 개항장 부근에서 시집 온 할머니가 계셨는데, '제밀댁'이라 불렸다.
개항과 함께 일자리가 많은 항구로 유명해진 이곳이 외지인들에게 '제밀'로 불린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광복 후 미군정의 결정에 따라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에 제물포시라고 불린 시기가 있었다.
1960년대 숭의동에 새로 생기는 기차역을 숭의역이라 정하기로 했다가 제물포역으로 바뀐 것은 참으로 아쉬운 '넌센스'이기도 하다.
2013년 08월 2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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